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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가 사랑하는 카리스마, <귀신이 산다>의 차승원
박혜명 2004-09-02

언제부턴가 차승원은 ‘온 가족’을 위한 광고 모델이 됐다. 온 가족을 위한 음료수 광고나 온 가족을 위한 과일 광고, 온 가족을 위한 고추장 광고 등이 줄을 잇고 있다. 아들한테 팔씨름을 지고 나자 망신살이 뻗친 아빠가 괜히 엄한 트집을 잡으려 든다. “아니, 넌 대체 지금 몇 문제를 틀린 거야? 응?” 이 대사는 콘티가 아닌 차승원의 생활 애드리브다. 이들 광고는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차승원에게서 허술하고 짓궂지만 미워할 수 없는 젊은 아빠의 캐릭터를 가져온다. <신라의 달밤>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특사> <선생 김봉두> 등 비슷한 좌표를 가진 일련의 필모그래피에서 그는 당황스러워 울상짓는 표정, 힘을 줘도 나사가 빠진 것 같은 몸짓, 목이 다 메어오는 처절한 목소리를 자신의 영화와 자신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기호로 만들었다. ‘변신할 생각은 없는지’류의 질문이 자신을 본격적으로 괴롭힐 무렵부터 “굳이 연기 변신을 해야 되느냐”는 대답으로 일관했던 그는 요즘, 이미 충분히 깊어진 우물을 더 깊게 파려고 삽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곤 한다.

그런 차승원이 등장하자, 그의 ‘온 가족’ 광고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튜디오는 ‘모델 차승원의 멋있는 공기’로만 채워진다. 상하로 길게 뻗은 커다란 체구와 새카만 눈매로 압축된 화려한 외모를 감추지 않겠다는 듯 그는 심플하면서도 화사한 의상과 인상적인 향수 냄새로 순식간에 주위의 시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한다. 이 순간 그는 모델의 정의를 육체로 입고 태어난 희귀종처럼 보인다. 35년이란 세월도 그 육체의 주인에게 군말없이 복종하는, 이미지의 품위를 위한 무게추에 불과한 것 같다.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편안하고 코믹한 이미지에 적응됐던 시청자의 두눈이 그 간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30분가량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가 아직도 타고난 외모와 갈고 닦은 캐릭터 사이에 모순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신라의 달밤> <광복절특사>를 같이 했던 김상진 감독의 신작 <귀신이 산다>의 개봉을 앞둔 그도 “그렇게 코미디를 많이 해도 여전히 나를 무겁게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원래의 내 이미지는, 벗기가 진짜 힘든 거 같아요”라며 모순의 상황을 인정했다. 애써 이미지를 구기고 눌러봤자 재킷 한벌과 눈빛 하나만 바꾸면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지는 걸 낸들 어쩌란 말이냐, 라는 탄식이 이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차승원이 코미디를 하는 즐거움은 거기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자기 패러디를 혼자서 즐기는 사람 같다. 드러내놓고 웃기는 것보다 은근한 유머가 자기 취향이라고 얘기하면서 차승원은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괜히 어색하게 웃는 거. 아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이렇게”라며 눈 주위와 입 주위를 경직시켜 말 그대로 정말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그런 게 너무 좋아. 내가 봐도 내가 너무 웃겨.”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몇장의 폴라로이드로 테스트 촬영을 하고 있는데 그가 한껏 모델 같은 포즈 위에다 멍청한 표정을 태연하게 얹고, 변기 위에 앉아 힘주는 자세도 저 혼자 즐겁자고 해보인다. 폼과 카리스마로 진지하게 어필했던 과거를 가진 그의 패러디가 그 누구의 것보다도 그럴듯해 보인다.

지금 그에게는 또 하나의 시간이 과거로 흐르고 있다. 무겁고 진지하고 강한 이미지를 벗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던 지난 몇년, 그것에서조차 벗어나 차승원은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새 목표를 이야기했다. 그는 더이상 코미디 장르의 옹호론자도 아니지만, 코미디영화만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맘도 없었다. “한없이 무거운 것도 싫지만, 한없이 가벼운 것도 싫어요. 그냥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그렇게 자유로워져야지 오래가지 않을까 생각해요.” 비열함과 선함을 동시에 지닌, 이중적이고도 나약한 캐릭터를 선택해서 현재 김대승 감독의 신작 <혈의 누>를 찍고 있는 차승원은 “남들에 의해서 내가 변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런 영화를 벌써 했어야죠. 사람들이 변신 얘기한 지가 언제인데. 내 방식대로 움직였으면 좋겠어요. 사람이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 돼야 하는데, 저는 요즘 객관적인 쪽을 떨쳐버리고 도박하는 심정으로 주관적이 되려고 하고 있어요.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소신은 있다는 거죠. 저 고집 엄청 세요. 제 얼굴이 착해 보이진 않잖아요.” 가끔씩, 불만 쌓인 철없는 사춘기 소년처럼 삐딱한 모습을 감추지 않던 차승원은 마지막으로 세 가지만 분명히 해두자고 했다. “첫 번째, 배우는 살아온 대로 연기하는 거고 그걸 거부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 두 번째, 내가 살아온 방식이 틀릴지언정 소신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 세 번째, 절대로 장르 콤플렉스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것.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거고,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두는 거고. 남들에게 휘둘려서, 남들이 이제 바꿀 때가 됐다고 말하니까 바꾸는 건 아니라는 것.” 기름진 폼과 카리스마에서 무지막지 내지르는 코미디로, 거기서 다시 은근한 자기 패러디를 거쳐 자유에 대한 소신을 이야기하게 된 차승원은 이렇게 자신의 말로, 이상한 모순이 아직도 섞여 있는 자신의 현재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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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욱 / 헤어 및 메이크업 장규 by 정샘물 / 스타일리스트 정윤기 by 인트렌드 의상협찬 제너럴 아이디어 by 최범석, 폴 스미스, 송지오 옴므, 타테오시안 런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