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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온다, 뒤늦게 마주친 눈부심으로, <취화선>의 유호정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인데, 어느 순간 이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다. 너무 익숙해서 그 아름다움을 미처 보지 못하고, 너무 소중해서 그 가치를 잊고 산 존재. 하여 어느 작가는 드라마 속에서 유호정을 ‘소금 같고 빛 같은 여자’라고 했던가. 그 빛을 스크린으로 불러오는 데만 꼬박 10년. 임권택 감독의 신작 <취화선>에 유호정을 캐스팅한 것은 충무로의 뒤늦은 자각이다. 기방이다. 술에 취해 잠들었던 장승업(최민식)이 눈을 떠보니 한 여인이 기도를 하고 있다. 기방의 기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단아한 기품에 매화향이 나는 여인. 이른 새벽 홀로 천주를 모시던 뒷모습에서 장승업은 이 여인과 자신이 끊을 수 없는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예감한다.

그림에 취해, 술에 취해, 인생에 취해 살다간 조선말 천재화가 장승업. 그의 생을 담은 <취화선>에서 유호정이 연기하게 될 인물은 양반집 출신이지만 기구한 사연 속에 기생이 된 ‘매향’. “늘 매향이 떠난 자리에 장승업이 뒤늦게 찾아와 그 흔적을 밟게 되고…, 그렇게 만나는 듯 비껴가지만 장승업과 매향은 보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감을 느끼는 정신적인 친구이자, 연인이에요.” 시화에 능하고 이지적인, 천주교가 박해받던 그 시절에, 깨어 있는 ‘신여성’이었던 매향은 장승업과 평생 엇갈리는 안타까운 사랑을 나눈다.

“캐스팅 제의를 받고 한달 넘게 고민했어요. 그동안에도 물론 영화할 기회가 있었지만, 사실 저 모험을 싫어하고 소극적인 사람이었거든요. 가만히 있으면 2등이나 할 걸 괜히 나가서 고생할까봐, 아예 시작도 안 하는 그런 사람요. 그러나 이번엔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 이런 기회가 아무에게나 오는 것도 아니고요.”

91년, 서울예대를 다니며 ‘정말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하며 CF모델을 하던 유호정은 황인뢰 감독의 눈에 띄어 <고개 숙인 남자>에서 기타리스트 박현준의 여자친구로 처음 우리에게 얼굴을 내비쳤다. 이후 스타메이커였던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의 주연까지 맡으며 말 그대로 ‘잘 나가던’ 시절. “공채 탤런트도 아닌데 자꾸 큰 배역이 떨어지니 시샘 반 부러움 반 어려움이 많았어요. 탤런트 대기실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눈치도 받았고요. <우리들의 천국> 찍을 때는 울어야 하는데 눈물이 안 나는 거예요. ‘눈물 한방울 못 흘리는 배우가 배우야?,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봐’ 하는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어요.” 인기에도, 연기에도 그렇게 욕심을 낸 것이 아닌데 지금까지 온 것도 “사람복이 많아서”라고 모든 덕을 남에게 돌리는 이 겸손한 배우는 특히 가복이 많기로 유명하다. <작별>의 발랄한 둘째딸이나 <청춘의 덫>의 재벌집딸 영주까지 김수현 작가는 유호정 특유의 소곳함의 이면, 밉지 않은 반말의 “유호정식 터프함”을 보일 기회를 선사했다. 또한 ‘한번 보면 잊기 힘든 얼굴’ 은수로 분했던 <거짓말>에서 노희경 작가는 유호정의 여린 팔목과 가는 어깨 어딘가에 숨어 있던 강인한 모습과 어머니같이 너른 심성을 끄집어내 주었다.

<취화선>의 본격적인 촬영은 7월에나 시작될 예정이지만, 유호정은 얼마 전 테스트 촬영을 나갔다. 사극도 한번 안 해본 터라 불편한 의상을 입고 아직 온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한 매향이었지만, 말 그대로 ‘test’ 촬영. 옷이 어떤지, 대강 화면에 어떻게 찍히는지 보는 거다, 라고 위로하며 나간 그에게 난데없는 쪽지대본이 하나 떨어졌다. “풀숏, 그저 여기서 저기까지 걸어가서 다시 돌아오는, 간단한 풀숏을 하나 찍는 거였어요.” 난생 처음 35mm 카메라 앞에서 한 연기. 하지만 찍힌 자신의 모습을 본 그는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좋아요. 걸어가는 내 뒷모습이 너무 어색하고 남의 옷 빌려 입은 거 같은 거 있죠. 타이트한 숏은 오히려 쉬워요. 하지만 뒷모습은 정말 방심하기 쉽거든요. 그건 매향이가 아니라 그냥 유호정의 뒷모습이었어요.” 조그마한 TV브라운과는 다른 커다란 스크린의 위엄을 실감하는 순간, “정말 노력하지 않으면 망신이구나, 큰일나겠구나…,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에요. 진짜 촬영 전에 그걸 깨닫게 된 게요.”

촬영에 앞서 유호정이 배워야 할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생황(여러 개의 피리를 묶은 것 같은 모양에 바가지가 달린 관악기)부는 것부터, 서예, 다도까지. “워낙 ‘척’하는 걸 싫어하고 잘 못하는 성격이에요. 피아노 안 치면서 손만 대역쓰고, 그런 게 싫거든요. 하지만 <취화선>은 배워야 할 건 배우고 들어갈 여유가 있어서 좋아요.” 조선말 기방여인의 발걸음, 옷 매무새, 말투, 장승업의 단소에 맞추어 생황을 함께 불고, 그가 치마폭에 매화를 그리면 그 옆에 시를 쓰는 붓끝 하나까지 ‘진짜 유호정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저 가는 손목은 몇달간은 먹을 갈고, 저 작은 입술은 부르트도록 피리를 불어야 할 테지. “저 아직 시나리오도 못 받았어요. 모든 건 감독님 머릿속에 있겠죠. 음…, 아직 시나리오를 주시지 않는 이유요? 그냥 매향이가 되라, 10년 넘게 연기를 했는데 대사를 못 하지는 않을 테니 역할이 몸에 익으면 연기는 그냥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거다, 그 뜻이 아닐까요? 드라마에서 대본보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했던 방식이 아니라 모든 걸 비우고서 그 인물이 되길 바라시는 것 같아요.”

69년생, 올해 서른두살의 유호정은 나이 먹어가는 것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20대는 뭘 해야 하나 방황도 많이 했고, 일에 대한 확신도 안 섰지만 지금은 좋아하는 일이 있고 좋아하는 신랑도 있고, 20대 때보다 훨씬 여유로워졌고 안정됐어요. 그래서 지금 내 나이가 오히려 좋고요.” 뚜렷한 이목구비보다는 선으로, 생김생김보다는 하나의 자태로 기억되는 사람. 그의 등장으로 충무로는 작은 봇짐을 하나 덜 수 있을까? 아니면 늦게 집어넣은 소금의 진짜 맛을, 늦게 만난 빛의 눈부심을 알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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