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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걸어봐, 늘 자유로울 수 있게, <스워드 피쉬>의 할 베리
황혜림 2001-07-19

허름한 트레일러 앞에 맘춘 빨간 스포츠카, 늘씬한 몸매의 곡선을 숨기지 않는 빨간 원피스의 그녀가 내려선다. 짧게 곱슬진 머리 아래 링귀걸이를 살짝 흔들며 `슬로비디오`로 다가오는 그녀의 이름은 진저. <스워드 피쉬>에서 천재적인 컴퓨터해커 스탠리를 거액의 범죄로 끌어들이는 유혹의 전령이다. 골프 스윙을 연습하던 스탠리에게 골프채를 받아든 그녀는, 짧은 원피스를 아찔하게 걷어올려 매끈한 다리를 과시하는 자세로 멋진 샷을 날린다. 그리고 전처와 사는 딸을 찾고 싶어도 소송비는 커녕 막일로 생계를 때우기에도 벅찬 그에게 한마디. “이런 상태가 좋진 않잖아요? 벗어나요.” 구원처럼 매력적인 이탈의 주문을 거는 팜므파탈, 할 베리가 택한 새 분신이다.

스탠리에게 건네는 <스워드 피쉬>의 대사는, 사실 베리가 자신에게 걸어온 주문과 비슷하다.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를 둔 베리는, 4살 때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를 따라 백인 위주인 클리블랜드에 살면서부터 이미 혼혈과 검은 피부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워야 했으니까. `얼룩말`이라고 놀림받던 그때부터 졸업 파티의 퀸으로 뽑혔다가 백인 아이들에게 조작이라는 지탄을 받아야 했던 고교 시절, “흑인 여성을 어디다 써야 좋을지 모르는” 할리우드에서 제 몫의 연기를 만들어가고자 애쓰는 지금까지도, 편견에서 벗어나려는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할리우드에서 여성이라는 것은 극복해야 하는 문제다. 흑인이라는 것? 물론이지. 난 내가 원하기만 하면 그런 조건에 저지당하거나 그걸 변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걸 안다. 아니면 외모에 의존하지 않고 마약중독자나 좀더 성격파 역할을 맡으면서 더욱 다양한 역할을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것도.” 그리고 베리는 후자의 길을 걸어왔다. 검은 피부는 물론이거니와, 미모라는 또다른 틀에서 자유롭고 싶어서다. 17살때 우연히 나간 미스 틴 오하이오부터 86년 미스 USA에 입상하기까지 각종 미인경연대회를 거치고, 모델로 먼저 성공을 거둔 베리에게 아름다운 육체는 늘 타고난 재능이자 장애였다. 모델들은 연기가 안 된다는 할리우드의 선입견이 공고하고, 베리 역시 그저 화면 속의 아름다운 정물이 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난 내가 진지한 연기자란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마약 중독자를, 터프걸을 택했다. 내 자신의 성적인 면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그런 TV시리즈를 접은 뒤 과감하게 선택한 스크린 데뷔는 91년작 <정글 피버>에서 새뮤얼 잭슨의 마약중독자 여자친구. 그뒤 백인 여성에게 입양된 아기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제시카 랭의 모정>의 미혼모, 정치가 워런 비티의 관심을 받는 <불워스>의 거친 빈민가 여성 등 피부색이나 미모에 상관없이 연기력을 다질 수 있는 역할들로 주목을 끌었다. 물론 사이사이 <마지막 보이스카웃>의 이국적인 댄서, <에디 머피의 부메랑>에서 바람둥이 에디 머피의 참사랑 등 다양한 조연들을 거쳤고, 생계를 위해 졸작 코미디 의 스타지망생 같은 역도 했지만, `몸`이 아니라 `연기`를 보여주겠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가장 최근작인 <엑스맨>에서 비와 바람을 부르던 은발의 `스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베리에게 가슴을 드러낸 반라의 모습으로 독서를 하는 등 “미모와 섹슈얼리티를 이용하는” <스워드 피쉬>의 연기는 하나의 도전이었다고. 노출신이 있다면 아예 시나리오를 보내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는 베리가 자신의 금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도로시 댄드리지 소개하기>덕분이다. 99년작 <도로시...>의 호연으로 평단의 찬사와 함께 골든글러브, 에미상을 수상하는 고지에 올랐다. 그리고 “늘 뭔가 증명해야 한다는 강렬한 욕구를 가져왔는데, 드디어 배평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나를 자유롭게 했다”는 말대로, 한결 홀가분해진 것이다. “삶의 수많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치면서 난 마침내 내 자신이라는 게 편안한 위치에 이르렀다”는 할 베리. 뉴올리언스에서 촬영중인 신작 <몬스터 볼>(Monster`s Ball)에서 또 달라질 행보 역시, 자유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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