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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순수악의 표상, <세이 예스>의 박중훈
사진 오계옥김혜리 2001-08-08

하기야 박중훈이 언제는 좋은 남자였던가. 마누라를 죽이려 드는가 하면 주인없는 돈뭉치를 들고 튀질 않나, 용의자를 인정사정 없이 두들겨패질 않나. 스크린 속의 박중훈들을 일제히 집합시키면 우리는 아마 못되거나 혹은 비열한 사내들의 제법 다채로운 컬렉션을 손에 넣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 악역 전문인가?”라며 싱글거리는 박중훈에게도 김성홍 감독의 스릴러 <세이 예스>에서 그가 연기한 M은 심한 축. 때묻은 회색 운동화에 그보다 더 칙칙한 회색 눈동자를 번들거리는 정체불명의 남자 M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마주친 한쌍의 젊은 부부가 단지 “너무 행복해 보인다”라는 이유만으로 따라붙어 최후의 관절 한 마디까지 바스러뜨려 버리는 불순물 제로의 순수한 악 덩어리다. 작품은 대중적 붙임성을 발휘하는 장르영화일지언정 M은 그래서 박중훈에게 모험이었다. 그건 동시에 박중훈이라는 배우가 할 수 있는 연기, 할 수 없는 연기를 자꾸 금긋는 사람들 앞에서 그가 다시 감행하는 반발이기도 하다. “살인마란 발전시킬 여지가 작은 캐릭터죠. 그래서 그냥 ‘미치광이’로 가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의 성철을 ‘광산촌 패륜아’로 단순히 정의하고 연기했던 것처럼.”

<세이 예스>에서 M은 스필버그의 <결투>(Duel)에 나오는 덤프트럭처럼 익명의 파괴욕을 표상하는 존재다. 그중에서도 소름끼치는 것은 마치 상대에게 “너는 버러지야”라고 속삭이는 듯한, 물고기처럼 차고 습한 박중훈의 눈. “눈에 에너지가 많은 건 타고난 면도 있지만, 감정을 즉각 행동으로 표현할 수 없는 입장으로 긴 시간을 살다보니 경멸도 항변도 애정도 눈으로 대화하는 법을 어느새 터득했다.” 그러고보면, 자연인으로서도 배우로서도 박중훈의 가장 무서운 표정은 눈만 살아 있는 무표정이다. 천변만화를 일삼는 그의 안면 근육은 돌연 정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냉기를 흘리는 것이다.

최근 박중훈은 아랫니와 윗니의 맞물림이 1mm 줄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악다물 일이 많아서인가 했더니 과로로 이뿌리가 삭은 탓이라고 한다. 카메라 앞에서 힘을 빼느라 힘을 썼던 <불후의 명작>을 덮고 뛰어든 스릴러 <세이 예스>와 <찰리의 진실>은 둘 다 활화산 같은 ‘분출’을 요하는 소모전이었다. 배우의 육체는 영화가 관객에게 가닿는 최종적 모멘트이기에 소중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박중훈은 요즘 ‘내부수리’중이다. 종합병원의 통증 클리닉, 한의원, 이비인후과, 치과를 순례하느라 하루해가 짧다. 일이 고되게 느껴지는 걸 보니 정말 탈진한 모양이라고 그는 자가진단을 내린다.

<세이 예스>의 기자시사회가 있던 축축한 월요일. 벌써 서른 번째인가 서른한 번째를 꼽는 출연작의 봉인을 뜯는 그날에도 박중훈은 늑장부리는 기자들의 도착시간에 초조해했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 인터뷰에서 박중훈은 어느 이야기 끝자락에 흘리듯이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나는 최고는 아니지만 좋은 배우고 유일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나를 대신할 사람은 선배도 후배도 없다. 성룡과 이소룡을 그래서 좋아하고, 더스틴 호프먼과 대니얼 데이 루이스를 그리 좋아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박중훈만큼 자신감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또한, 박중훈만큼 불안한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다. 남달리 높은 프라이드와 남달리 깊은 회의 사이에 걸려 있는 그 아찔한 낙차가 그에게 에너지를 주입하고 그를 끝없이 보채게 한다. 분류에 유난히 능한 박중훈의 말대로 삶에 대한 집착이 외형적 에너지가 되는 직업이 있고 안 드러나는 직업이 있다면 배우는 분명 전자에 속한다. 그건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가 그의 격정과 도전과 고민을 지켜보게 되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살인마 M 만들기

회색 콘택트렌즈는 내 아이디어였다. 살인마 M은 실제 모델도 없고 유추하기도 힘들고, 드라마로부터 힘을 받기도 어려운 캐릭터라 쉽지 않았다. 가학하는 상황 역시 장소만 바뀔 뿐 되풀이된다. 그래서 논리를 없앴다. 김성홍 감독의 요구도 그러해서, 광기의 구체적 ‘색깔’에 대해서는 별다르게 설정하지 않았다. 남들은 엄청 무섭다고 하는데, 내가 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는 캐릭터다.

<세이 예스>를 ‘비극적 스릴러’로 부르는 이유

이 영화가 가진 감정적 차원은, 사람이 극한 상황에 몰렸을 경우 연인이나 부부처럼 친밀한 소속감을 공유한 인간관계가 겪는 변화와 거기서 발생하는 슬픔에 있다.

영어 훈련

35년간 영어교과서의 오류를 잡는 일을 했던 선생님에게 본격적 레슨을 받는다. 영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영어가 서툴 때 사람들은 극히 겸손해지거나 극히 조용해지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나 나는 영어로 말할 때도 ‘나’를 잃지는 않더라. 그것만 해도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여름 휴가

일가가 사는 일본 나가노현으로 <글래디에이터>니 <매그놀리아>니 한동안 못 본 영화들의 비디오 테이프를 챙겨들고 간다. 맑은 물과 정적, 숲의 기운을 몸 안에 들이고 올 계획이다.

앞으로 일정

<찰리의 진실>의 녹음작업이 올 가을에 있고, 내년 초 LA와 뉴욕 프리미어에 참석할 예정이다. 탈진한 몸을 추스르고 오랜만의 휴식기에 들어가는 것이 먼저다. 물론, <세이 예스>가 잘되면 쉬는 것이고, 못 되면 노는 것이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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