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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는 우리가 늙어서 고맙대”
2001-09-05

<취화선> 제작하는 태흥영화사 대표 이태원 (1)

● 태흥영화사의 촬영현장에 가면, 거의 어김없이 이태원 사장을 만난다. “회사에 앉아 있으면 궁금증이 나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 영화사 대표는 매끈한 비즈니스맨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분위기지만, 이태원 사장에겐 아직도 영화제작자라는 직함만큼 어울리는 게 없다.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과의 멋진 파트너십으로, 5년간 지속된 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서편제>)과 칸영화제 경쟁부문 첫 진출(<춘향뎐>)이라는 영광을 모두 안았으니,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성공한 제작자임에 틀림없지만, 이태원 사장의 자리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다. 여전히 1년에 영화 한두편 만들면서, 촬영현장에 나와 필름 감기는 소리에 취해 산다. <춘향뎐>에 이어 다시 험한 장정에 나선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 촬영현장에서 들뜬 얼굴로 앉아있는 이태원 사장을 만났다.

늘 촬영현장에 나와 있는, 요즘 보기 드문 제작자입니다.

매번 나오지는 못해. 그냥 자주 다니는 편이지. 회사에 앉아 있으면 궁금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거든. 현장이 재미있잖아. 홍보 담당하는 송혜선 이사는 내가 현장에 있지 않으면 전화로 계속 물으니까 귀찮다고 차라리 현장에 나오래.

사장님이 늘 나와 있으니까, 스탭들이 불편하지 않을까요.

이상하지만, 그게 안 그래요. 스탭들이 좋아해. 우스갯소리를 많이 해서 그런가. 아니, 속으론 불편한데 내색을 안 하는 건가. (웃음) 그래, 제작부 애들은 좀 불편할지도 몰라. 그래도 내가 불편해할 짓을 별로 안 하니까. 우리 회사 영화현장은 감독이 보스야. 제작자가 보스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있어도 별로 신경쓸 게 없는 거야.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과는 참 드물게 끈질긴 인연입니다.

그러게.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잘하니까, 이젠 물러나야겠다는 생각도 했지. 그랬으면 두 사람이 젊은 친구들하고 일해야 하는데 불편했을 거야. 나도 욕심이 남아 있고 해서 이렇게 꼰대들끼리 또 모인 거지. 이제 친구도 없어. 영화판에 있다보니, 다른 쪽 친구들은 거의 없어졌어. 두 사람이 제일 가까운 친구야. 친구끼리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춘향뎐>도 여러모로 힘든 영화였는데, 이어서 <취화선> 한다는 게 좀 부담스럽지 않았나요.

임권택 감독이 하는 건데, 내가 제작해야지 누가 하겠어. 사실, 또 사극이란 게 마음에 걸리긴 했어. 제작자라는 게 돈을 벌든가, 적어도 손해는 나지 않아야 제작을 계속할 수 있는 거 아냐? <춘향뎐> 개봉했을 때, 젊은 애 둘이 극장 나오면서 지들끼리 “아유, 재수없어. 댕기머리”라고 하더라고. 난 마음이 상했지. 사극이란 게 요즘 애들한테는 영 안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뭐 관객을 탓할 수는 없잖아. 사실 <춘향뎐>이 작품성은 아주 좋지만, 젊은 사람들한테는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영화였어. 그런데 <취화선>은 달라요. 최근 임 감독 영화 중에서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어. 여자도 있고 술도 있잖아. (웃음) 찍는 거 보니까, 볼거리가 너무 화려해서 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려지지 않을까 하는 게 요즘 걱정이야.

순제작비가 50억원이라는 것도 부담일 텐데요.

이야기를 보면 그만큼 들 영화야. 그런데 이번엔 다른 게 있어. 오픈세트에만 11억원이 들어요. 임 감독하고 사극 여러 번 했지만 이런 건 처음이야. <춘향뎐> 때도 초가집 몇채 짓는 거였거든. 한 3억, 4억 들었지. 그런데 이번엔 소도구, 대도구에만 그만큼 드는 거야. MBC 미술센터하고 계약하는데 가슴이 철렁했어. 그런데도 임 감독은 자꾸만 규모를 키우려고 하고. 난 자꾸 줄이자고 하지만, 그러다 결국 저 양반 맞춰가는 거지 뭐. 까짓거 몇억 더 들어봤자, 손님 그만큼 더 들면 되는 거고, 손해봐도 몇억 더 들었다고 망하기야 하겠어.

투자자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곧 되겠지. 관심들이 많으니까 별 문제는 없을 거야. 지금도 투자는 오픈돼 있어.

오픈세트는 영화진흥위원회도 함께 짓는다는데.

영화진흥위원회가 60% 내지. 만들고 나면 그건 거기 소유가 돼서 관광지로 개발되는 거고. 과거 영화진흥공사 시절엔 별로 관심도 없었고 그저 그렇게 생각했는데, 영화진흥위원회가 확실히 달라졌어.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거든.

칸의 붉은 카펫을 밟겠다는 소망을 <춘향뎐>으로 이뤘는데, 욕심이 더 생기진 않나요.

그게 그래. 내가 사실 20년 동안 붉은 카펫 이야기를 했잖아. 그런데 그거 한번 밟아보니까 욕심이 더 나는 거야. 명예욕이라고 그럴진 모르지만, 난 상 받았으면 좋겠어. 촬영현장을 보니까 더 그래. 너무 근사해. 이게 엄청난 사람들이 힘을 합친 영화인 거야. 한국화 전공하는 대학교수까지 자청해서 엑스트라하고 또 그 훌륭한 서예가들이 무료봉사하는 영화가 또 어딨겠어. 어제 최민식하고 유호정하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데, 얘들 연기가 너무 멋있는 거야. 이거 보답받아야 하거든. 이런 것도 있어. 동아시아면 몰라도 유럽이나 미국에서 개봉하려면 영화제 통하는 길밖에 없어. 이게 장사에도 도움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욕심이 생기지, 당연히. 그게 뭐 대단한 게 아니라도, 상 한번 받고 싶어. 남은 건 그거 하나야.

<장군의 아들>이나 <서편제>는 당시 흥행기록까지 경신했습니다. 최근엔 흥행작이 없어서 흥행의 맛이 그립기도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립지. 임 감독한테 농으로 그랬어. 요즘 약이 좋아서 옛날보다 한 10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지. 돈 되는 영화 한번 하자고. 돈 되는 영화가 뭐겠어. 폭력과 섹스 아냐. 임 감독은 그냥 웃기만 하는데, 돌아서면 또 착한 생각 들지. 우리가 영화 하면 얼마나 더 하겠다고, 좋은 영화 한편이라도 더 만들어야지.

안성기씨와는 오랜만에 작업합니다.

<축제> 뒤로는 처음이지. 말이 났으니까, 안성기 이야기 해야겠어. 캐스팅할 때, 내가 안성기한테 그랬어. 성기야, 면목없다, 이번엔 조연이다, 그랬어. 왜냐면 우리 영화할 때 안성기가 주연 안 한 적이 없었거든. 더 미안한 이야기도 했어. 너 얼마 받냐, 거기서 5천만원 깎고 가자, 그랬거든. 그런데 이 사람이 두말 안 하고, 그러죠 뭐, 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미안하고 고마웠겠어. 그날 밤에 배우들끼리 서로 잘 모른다고 팀워크도 다질 겸해서 술 먹고 노래방에 같이 갔어. 거기서 내가 감탄을 한 거야. 사실 성기로선 적당히 하고 갈 수도 있고, 그런 마음 먹을 만도 하잖아. 그런데 이 사람이 끝까지 후배들 감싸고 분위기 맞춰주고 하는 거야. 내 안성기 하고 여러 번 놀아봤지만, 노래하는 데 가도 두세곡 이상 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그날은 열두곡 부르는 거야. 내가 다음날 성기한테 전화했어. 야, 우리 어제 했던 이야기 없던 걸로 하자, 너 받던 대로 다 줄게, 내가 그런 거야. 멋진 친구야. 정말 없어선 안 될 배우야. 그런데 걔가 그러대. 다른 현장에 가면 자기가 제일 늙었는데, 여기 오니까 젊어서 좋다는 거야. 우리가 늙어서 고맙다는 거지. 그래서 우리 꼰대들이 영화해야 하는 거야. (웃음)

▶<취화선> 제작하는 태흥영화사 대표 이태원 (1)

▶<취화선> 제작하는 태흥영화사 대표 이태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