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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우물에 꿈이 찰랑, <고양이를 부탁해> 배두나
김혜리 2001-09-19

어린 뇌성마비 시인이 불러주는 시를 타자기로 또박또박 받아 치는 참을성 있는 아이. 요일 칫솔부터 이마에 묶는 손전등까지 행상들이 내미는 잡동사니들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는 심성 고운 아이. 그러면서도 외항 선원이 되겠다고 장정들이 우글대는 사무실을 기웃거리는 엉뚱한 아이. <고양이를 부탁해>의 태희는 작고 깊은 우물 같은 여자애다. 친구들은 그녀에게 다가와 비밀과 투정을 퐁당퐁당 던져 넣고, 차고 맑은 물 한 모금을 얻어 간다. 하지만 그녀의 바닥을 본 이는 아무도 없다.

별만 총총하고 인적이 드문 밤이면 우물은 몰래 마음을 졸이기도 한다. 아이들이 더이상 날 찾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난 어떻게 하면 큰 바다로 갈 수 있지? 조밀하고 담담한 문체의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갈대가 우거진 강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는 태희의 몽상은 거의 유일한 판타지신이다.

배두나는 그러나 순진한 몽상가에서 한참 더 자란, 꽉 찬 일인분의 배우다. 야무지고 정확하며 매사에 이유가 있고 과녁이 있다. “재미로 했는데 할수록 치열해져요. <플란다스의 개>부터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자꾸 하고 싶고 더 잘하고 싶고. 일이 없으면 견딜 수가 없어요.” 이렇게 영화를 ‘마약’이라는 애칭으로 부르지만, 그녀의 중독은 마구잡이가 아니라 치밀하고 합리적이다. 배두나는 한달 전 <복수는 나의 것> 촬영현장에서 처음 만난 기자에게 대뜸 정재은 감독의 단편 <도형일기>를 봤냐고 너무 좋지 않냐고 조급하게 동의를 구해왔다. “시나리오부터 맘에 들었어요. 하지만 내가 들어갈 영화의 세계가 궁금해서 건방지게도 감독님의 단편영화를 청해서 봤어요. 흘러가는 가운데 날카로운 침 같은 게 있었어요.” 아직 표현은 막연하지만 그녀의 말 속에도 날카로운 침 같은 것이 있다.

남들은 의아해한 행보였지만, 카메라 세대가 돌며 하루에 수십신을 찍는 TV연속극을 선택한 것은 연기자로서 ‘근육’을 다듬고 대형 연기자 선배들의 곁을 얻는 보람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화면에 비쳐 나오는 그녀의 천성이 스테레오타입들로 조립되는 대중적 장르영화와 잘 맞지 않는다는 소리를 싫지 않아 하면서도, 무난한 연기 역시 잘하고 싶다고 그릇 큰 배우들은 다들 그렇지 않으냐고 재빨리 덧붙여 자기의 가능성을 재빨리 영리하게 열어둔다. “배우들한테는 함정이 있어요. 시나리오로 보면 모르는데 영화가 관객과 만날 때 갑자기 드러나는” 하며 살짝 한숨을 흘리는 품은 노숙하기까지 하다.

잠시 개인사진 촬영 시간. 카메라 앞에서 기지개를 펴듯 부드럽게 몸을 말고 펼치는 리듬이, 동그란 코와 꽃받침 모양의 입술이 살짝 들리며 하품하는 모양이 영락없는 고양이의 정령이다. 연기는 물론 몸의 실루엣, 의상까지 제 성에 차지 않으면 안달하는 그녀, 말없고 꼼꼼한 정재은 감독에게 정답을 내놓고 싶어 얼마나 마음이 바짝 탔을까. “전 졸라대는 스타일이거든요. 감독님이 안 가르쳐주시면 전 못한다고 엄살떨었죠, 뭐. 지금까지 <플란더스의 개>도 <청춘>도 다 감독님들이 코치해주신 거라고요.” 한편 그녀는 정재은 감독이 어린 배우들의 어깨에 무거운 책가방처럼 지워준 자유도 달게 즐겼다.

태희의 꼭 끼는 반코트, 빨간 장갑, 살짝 핀을 지른 앞머리는 배두나의 착상. 윤택하지만 개성이 질식된 중산층 가정에서 해방되고 싶어하는 태희의 욕구를 조금씩 ‘오버’한 옷차림으로 표현하려는 의도였다. “의상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몰입에 도움을 주거든요. 의상팀과 상의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동대문으로 직접 쇼핑가요." 이런 욕심쟁이. 배두나는 최근 페르시안 고양이 한 마리와 치와와 두 마리를 입양해 고양이는 배배, 강아지는 두두와 나나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자기 이름을 애완동물을 빙자해 제곱하다니, 역시 욕심쟁이야 속으로 끄덕이는데 “평생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앞으로 10년은 치열하게 일할 것 같아요. 그래봤자 서른셋이잖아요”라고 배두나가 또랑또랑 헤아린다. 서른셋. 그 아득한 고개까지 이 민첩한 고양이는 어떤 궤적으로 털실 뭉치를 굴려갈까. 영화 속에서 태희가 그렇게 말했다. “가면서 생각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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