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인터뷰
“아낌없이 드러내길 꿈꾸었다”
2001-10-17

<고양이를 부탁해> 감독 정재은 (2)

<고양이를 부탁해>는 인물과 스토리뿐 아니라 그 영화만을 위해 존재하는 ‘렌즈’ 같은 것이 느껴져서 좋은 영화였다. 이마에 드리운 앞머리, 옆에서 본 눈매, 동그란 콧망울 등, 미디어가 눈길을 주지 않는 소녀들의 말간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눈도 남달랐다.

워낙 사진 찍는 일을 즐긴다. 새로운 영화란 결국 새로운 인물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여배우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고정돼 있다. 스크린 위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쌍커풀에 갸름, 오똑한 얼굴, 이런 식으로. 하지만 미에 대한 기준도 보는 이가 남자냐 여자냐에 다르다. ‘예쁘다’는 개념이 다양했으면 좋겠다. 찢어진 눈도 동그란 코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예쁜 여성의 이미지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좀 다른 캐릭터의 미를 잡아내고 싶었다.

인천 이야기를 뺄 수 없다. <둘의 밤>에서 나들이 장소였던 인천으로 돌아갔는데.

<둘의 밤>을 찍을 때 바닷가장면을 넣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다. 그런데 극중에서 기껏 인천에 간 두 소녀가 하는 말이라고는 “한강이 훨 낫다”가 전부다. (웃음) 그 당시 ‘다음 영화는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아이들을 찍어야지’라고 결심했다. 그냥.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결정하고 나서 인천을 좋아하게 됐다. 인물 설정과 인천은 불가분의 관계다. 인천은 주변도시다. 우울하고 비관적인 ‘주변’이 아니라 생성하고 움직이고 도시 자체로서 열려 있고 중심을 향해 가는 공간으로서 미래에 대한 에너지가 있다. 지저분한 뒷골목, 식당, 전깃줄, 고가, 원목 트럭들, 인천이라는 도시의 그 풍성한 이미지들이 첫 영화 속 여자 아이들의 풍경을 훨씬 풍부하게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애들의 동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인천의 다양한 공간을 가능하면 많이 끌어들이려 했다.

영화 속에서 태희가 타이핑하는 주상의 시는 모두 직접 썼나.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시는 쓰지 않는 편인데, 주상의 시는 내가 다 썼다. 처음에 나오는 <최선>이라는 시를 읽고는 스탭들이 “감독이 우리에게 하는 부탁”이라고 말하더라. ‘네가 왜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마지막 시는 촬영감독과 다투고 나서 그때의 감정을 모티브로 삼았다. (웃음) 몸이 불편한 주상이는 태희가 쉽게 떠나지 못하게 하는 장치다. 원래는 주상과 태희가 섹스 경험을 놓고 혼란해하는 이야기도 한 덩어리가 있었는데 찍다보니 태희와 지영의 관계가 내러티브의 줄기로 이해되는 것 같아서 개인의 이야기로는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화면에 크게 박아 넣었는데, 시나리오 지문을 봤을 때 예상한 CF적인 경쾌함보다 오히려 묵직한 느낌을 더하는 효과를 보았다.

문자가 어떻게 떠야 좋을까 그래픽 디자이너와 많이 상의했다. 처음에는 날아가는 비행기 뒤를 따라 글자가 근사하게 사라지는 안도 나왔다. 그러다 내가 “글자가 사람들 마음에 확 달려들었으면 좋겠다”고 단순하게 제안한 것이 지금 보는 결과다. 메시지의 글자체는 지영이가 그리는 텍스타일 디자인이나 혜주네 회사 창의 세계지도와 마찬가지로 어떤 네모칸을 채우고 안 채우느냐 선택에 따라 모양이 나오는 ‘모듈’(module)의 형식이다. 디자이너 이관용씨가 결국 휴대폰 액정화면의 글자를 돋보기로 하나하나 보면서 그렸다. 화면 구성 측면에서 말하자면, 메시지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나 멀티프레이밍은 쉬운 편이었다. 정작 어려운 건 태희가 지영의 집을 찾아가는 길 같은 장면의 그림 처리였다.

영화음악에 대한 시사회 반응이 좋다. 소개한다면.

<진정한 프렌치 프라이의 시대는 갔는가?> 등을 부른 ‘별’은 홍대 부근에서 활동중인 3인조 밴드로 아는 사람을 통해 소개받았다. 청춘영화의 어떤 대목에서는 음악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별’의 음악에서 신선한 느낌을 받아, 내가 제일 좋았던 세곡을 골랐다. 미디 음악은 잘못하면 노래방 음악처럼 촌스럽기 십상인데 감각이 새로웠다. 실은 가사가 진짜 좋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노래말이 약간 뭉그러지면서 보이스의 느낌이 전달되는 지금 상태 그대로 좋다고 생각했다. 이 노래들이 라디오에서 레코드 가게에서 울려퍼지면 행복할 것 같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함축된 의미와 상징으로 꽉 찬 영화다. 나중에 보면서 ‘틈’에 대한 아쉬움, 갑갑하다는 느낌은 없었나.

내가 미학에 있어서 이건 생각지 말자는 부분이 있다면 이른바 여백의 미다. ‘여백의 미 따위’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어떤 경지에 이를 때까지는 뭘 비워내는 것보다는 잘 채워내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영화가 사람들에게 조금 힘들 수도 있겠지만, 선비적인 유유자적함을 추구할 경지에 나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미에 너무 쉽게 경도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다.

신인감독으로서 러닝타임이나 다른 면에서 계산 착오는 없었나. 완성된 영화가 원래 구상의 몇 퍼센트나 충족시켰다고 자평하나.

처음 편집해 보니 20분 정도 시간이 넘쳤다. 큰 오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래 설명적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편은 아니지만 편집에서 분류심사원이나 혜주의 언니와 관련된 부분이 사라진 것은 영화적으로 약점이 됐다. 전례가 없는 영화라 예상 못한 요소가 많이 출현했고 날씨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만족도는 40% 정도? 그것은 제작환경의 한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어떤 균형점을 찾는 기술, 스케줄 관리능력이 미숙했고 내게 맞는 제작 스타일을 아직 온전히 찾지 못해서다. 영화 편수와 함께 주어진 시간과 조건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힘이 점차 향상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아마 서너 번째쯤의 영화를 만들면 내가 봐도 잘 찍었다, 다시 찍어도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겠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개봉이 임박했다. 감독은 <고양이를 부탁해>를 ‘상업적인 영화’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나는 내 영화가 재밌는데, 그건 모든 연출자가 하는 착각이라더라. (웃음) 그러나 실제로 지금은 영화 하나를 짊어질 수 있는 파워를 가진 20대 초반의 배우들이 나타났고 <고양이를 부탁해>의 배두나, 이요원이 그런 배우들이다. 그들이 스스로 끌려서 선택한 영화라면 잘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난 굉장히 대중적인 사람인데, 이다지도 대중적인 내가 만드는 영화가 대중적이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웃음) 많이 노출되지 않은 영화라 호기심도 존재할 테고. 만약 대중과 접점을 찾지 못한다면 나의 판단착오니까 반성하고 어떻게 소통할지,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당대에 대해 고민을 더 할 것이다. 영화를 아무리 만족스럽게 만들어도 보러 오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고집 피워 여기까지 온 만큼 이 영화가 투자한 만큼 거둬들이는 작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마음속에 벌써 다음 영화가 있을 텐데.

<도형일기>의 초등학생 소녀, <둘의 밤>의 고교생을 지나 <고양이를 부탁해>로 이젠 스무살까지는 끝났다. 스무살은 특별한 나이다. 사람들은 스무살까지는 한해씩 나이를 세고 그 다음부터는 20대 초반, 후반 이런 식으로 헤아리지 않나. 하지만 <고양이를 부탁해>는 스무살이라는 나이에 연연하는 영화는 아니다. 나이를 먹어도 스무살의 불안은 평생 간다고 생각한다. 중년이라 해도 영화 속 스무살들을 보면서 저 애들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구나라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젠 20대 초반의 이야기로 가지 않을까. 새 영화에 대한 감은 영화를 만드는 중에 제일 잘 떠오르더라. 다음 영화는 남자들의 이야기, ‘로드 무비’가 될 거다. 여자인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스포츠를 밤새 할 수 있는 에너지 같은 것인데, 다음 영화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20대들을 따라다닐 듯하다.

그럼 차라리 ‘스트리트 무비’ 아닌가?

한국에서 로드 무비라면 국도를 죽 따라가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서 ‘로드 무비’의 개념은 좀 다르다. 길이나 도로가 아니라 ‘집 밖’이라는 의미에서 집 안 풍경, 가족사가 나오지 않는 ‘로드 무비’를 생각하고 있다. 한국의 로드 무비들을 보며 공부할 생각이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홍보가 끝나면 어떻게 시간을 보낼 계획인가.

원래 막연하게 시간을 잘 보내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바로 다음 작업에 들어갈 것 같다. 물론 좋아하는 여행도 갈 것이다. 실은 갈라파고스 섬에 너무나 가고 싶었다. 경비행기 타고 다시 배로 갈아타고 하면서. 그런데 경비가 상상을 초월해서 낙심하고 있다. 글 김혜리 vermeer@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고양이를 부탁해> 감독 정재은

(1)

▶ <고양이를 부탁해> 감독 정재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