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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시장은 내 게임이 아니었다 ”
2001-11-07

김승범 튜브엔터테인먼트 대표

“올해 목표는 배급사 3강 진입과 매출 1위 달성이다.” 올해 초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자신감을 보였던 김승범 튜브엔터테인먼트 대표는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아 자신의 계획을 철회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최근 CJ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대신 튜브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 제작 및 제작관리하던 작품들의 배급권을 넘기기로 결정한 그의 표정은, 그런 사정 때문인지 그리 밝지 않아 보였다. 물론 더이상 자금을 구하기 위해 마음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스치긴 했지만, ‘메이저배급사 진입’이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심경이 복잡한 듯했다. 하지만 영화계에서는 충무로 생활 7년째를 맞는 그의 경험과 다양한 노하우가 살아 있는 한, 김승범 대표가 차지할 지분이 여전히 작지 않다고 판단한다. 를 비롯,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튜브> <내츄럴시티> 같은 초특급 대작들을 매만지는 일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일신창투 수석심사역으로 충무로 금융자본 유입의 물꼬를 텄고, 당시 <체인지> <할렐루야> <접속> <모텔선인장> <조용한 가족> 등의 투자와 배급을 이뤄냈으며, 투자·배급사의 제작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통해 합리성을 높여왔던 경력으로 미뤄볼 때, 그가 당분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해 보인다.

CJ와의 논의는 현재 어떤 단계인가.

실사 내지는 업무파악을 위해 CJ쪽 관계자들이 튜브에 상주하고 있다. 자금을 대고 장기적인 협력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서로를 정확히 알아야 하니까.

CJ와의 결합이 의외인 점은 배급을 포기한 것이다. 튜브 출범 당시부터 김 대표는 영화에서 안정적인 사업이 될 수 있는 것은 배급뿐이라는 입장을 밝혀왔다. 태생부터 메이저배급사를 지향했던 튜브가 배급을 포기한다는 결정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맞다. 상장을 통해 회사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제3의 배급사로 자리매김한다는 목표를 수정한 것이다. 한국영화시장이 급격히 바뀌었다. 상황이 연초에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라졌다. 우선 제작비가 엄청 상승했다. 연초만 해도 20억원이면 작품을 해볼 만했지만 이젠 상업영화시장에서는 저예산영화 취급당하고 있다. 튜브의 문제는 자체적인 자본력으로 제작하는 회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자본금은 20억원 정도이며 나머지는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받아야 한다. 코스닥에 간다면 안정되겠지만, 그것은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다. 솔직히 말해 그때까지 버티긴 힘들겠더라. 만약 어찌어찌해서 개봉할 때까지 버티고 그 영화가 돈을 벌어준다고 해도, 지명도나 투자자의 관심은 높아지겠지만 결국 새 작품을 만들며 투자자를 설득해야 하는 것은 똑같다.

그동안 배급업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계속 좋은 물건을 갖다대야 한다는 중압감에 너무 짓눌렸다. 가장 힘든 게 자금은 없는데 좋은 작품이 눈앞으로 지나갈 때다. 솔직히 배급시장은 나 같은 개인이 하기엔 힘들다. 올해 초와 달라진 생각이 있다면 이건 내 게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기업의 경영자로서 주주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제작자의 역할만을 생각한다면 작품 한편에 목숨을 걸면서 무리해서라도 끌고갈 수 있지만, 경영자 입장에선 항상 최악의 상황을 전제하고 주주의 이익을 보호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솔직히 그동안 나도 모르게 배급업에서 3강에 끼고, 1등, 2등을 하는 문제에 매몰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건 결정이 너무 급작스러웠다.

동양과 협상할 때만 해도 배급을 포기한다는 점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CJ의 제안이 들어왔다. 사실 이강복 대표도 처음 만났을 때는 막판까지 그 얘기를 못하더라. 1시간 반 동안 다른 이야기를 던지더니 마지막에 미안하다는 태도로 “배급을 포기하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지더라. 그러면서 한국영화의 소싱, 제작관리일에서는, 그 분야에 전문적인 노하우를 갖고 있는 튜브가 함께 협력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솔직히 튜브가 배급을 CJ보다 잘하진 않으니 그 부분을 CJ로 통합시키면 윈윈게임이 될 것 아니냐고 하더라.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금사정이 좋지 않았나.

그렇다. 정말로 10월 말을 넘어가면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배급한 영화를 보면 그다지 깨진 건 아니다. <천국의 아이들> <왓 위민 원트>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툼레이더> 등은 돈을 벌었고, <쥬바쿠> <포스트맨 블루스> <파이란>이 좀 많이 깨졌다. 결산한다면 수익과 손실이 비슷할 것이다. 결국 우리 회사의 문제는 내가 경영을 잘 못했다는 것이다. 투자가 과도했던 건 사실이다. 예전에도 밝혔듯이 메이저가 되기 위해선 큰 규모의 작품을 만들어 라인업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거꾸로 그게 또 회사에 큰 타격을 준 것도 사실이다. 돈이 많이 들어간 것도 그렇지만, 만약 영화가 제때 나와주기만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개봉이 9월로 예정됐던 <…로스트 메모리즈>가 3개월 이상 밀리고, 12월 개봉 예정이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도 밀렸다. 양쪽에 들어간 돈이 150억원 이상이다. 그렇게 돈이 잠겨버리니까 사정이 어려웠다. 또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전에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인지 프로젝트 파이낸싱도 잘 이뤄지지 않았다.

CJ와 결합하면 제작관리 기능이 중복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배급이나 제작관리에서나 장기적으로는 통합적으로 운영돼 시너지를 발휘할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 관해서는 좀더 심도있는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사실 CJ는 극장체인도 갖고 있고 제일제당이라는 뿌리도 있어 배급, 유통에서 우리보다 잘한다. 또 CJ가 우리에게서 높이 사는 부분은 제작비 초과, 제작지연 등의 문제는 있지만, 어쨌거나 2년 동안 이 프로젝트들을 중단없이 이끌어왔다는 점인 것 같다. 서로의 장점을 살린다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건너서 들은 얘기지만 이강복 대표가 이번 딜은 김승범의 산업적인 노하우, 즉 투자 및 제작관리에 관한 노하우를 사는 것이라고 했다더라. 기분이 좋더라.

그러고보니 그동안 튜브는 제작관리 기능을 강조해왔다.

그것은 내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일신창투 때 기라성 같은 제작자들과 두세편씩 해봤고 큰 덕을 봤다. 그런데 영화산업이 발전하고 자금사정이 좋아지다보니 이분들이 우리 같은 투자자들을 별로 절실하게 여기지 않는다. 브랜드 파워를 갖고 있는 제작자와는 일을 같이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제작자나 신인감독을 데리고서라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갖기 위해 제작관리 기능을 굉장히 강화했다. 그래서 많이 간섭하고 많이 관여했다.

동양과의 협상은 어떻게 된 것인가.

지난 4월부터 시작해서 오래 끌었다. 의향서를 6월에 교환했지만, 이견이 남아 있었다. 그 이견을 조정하던 중 유니코리아에서 좋은 제안을 해왔던 것이다. 그 이후로 다시 사정이 안 좋아져 다시 동양과 협상하게 됐다. 여러 가지 조건에 대해 논의를 했고, 동양과 함께하기 직전까지 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CJ에서 제안을 해왔다. 그때부터 다시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동양과의 논의에 관해서는 그동안 협상을 계속해온 파트너로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아무튼 한 고비를 넘겼는데, 개인적으로는 시원섭섭했겠다.

물론 배급을 포기했으니까 섭섭한 부분이 있다. 또 의욕이 생기는 것도 있다. 우리보다 배급을 못하는 팀과 교섭을 했다면 모르지만, 배급도 잘하고 극장체인도 있고 상당부분 안심할 수 있는 회사와 같이 가게 됐기 때문이다. 어차피 배급을 포기한 상태에선 제작, 제작관리에서 능력을 보여주는 것만 남았다. 결국 <…로스트 메모리즈>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잘해야 한다. 당분간 자금문제로 시름하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이 놓이는 측면도 있다.

스스로 튜브를 평가한다면.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그동안 우리 회사를 서로 가져가겠다고 싸웠지, 서로 안 가져가겠다고 싸우지 않았다. 튜브의 가능성을 키워왔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시스템의 합리성을 추구했다는 점도 있다. 돈을 갖고 있다고 휘두르지도 않았고, 예산을 넘어섰다고 현장을 질타하지만도 않았으며, 기간이 길어진다고 무조건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았다. 현장에 가서 함께 고민하려고 애썼다. 오히려 그런 게 현재의 상황을 더 심화시킨 것도 있는 것도 같다. 아무튼 이 과정 속에서 우리만이 배운 노하우나 자신감이 쌓여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금융자본을 충무로로 끌어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향후 금융자본의 추이는 어떨 것 같나.

알다시피 자본이라는 것은 굉장히 상대적이다. 영화가 아무리 잘돼도 IT라든가 다른 쪽이 잘되면 다 빠져나갈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은 영화가 어떤 업종보다 수익률이 좋고 회임기간이 굉장히 짧다는 장점을 갖고 있어, 2∼3년간 한국영화가 이렇게 강세를 지켜준다면 당분간 금융자본은 버틸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이 활황기가 언제까지 갈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굉장히 오랜만에 회복시킨 한국영화에 대한 신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조폭 마누라> 같은 경우도, 그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 이 영화의 성공을 보고 따라오는 다른 제작자들이 비슷한 영화를 기획함으로써,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문제다.

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