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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제작 추진중인 명필름 이사 이은
사진 오계옥황혜림 2002-02-06

“나를 위한, 내 세대를 위한 영화를 만든다”

<섬> <와이키키 브라더스> <욕망>의 공통점. 명필름이 제작한 영화? 맞다. 좀더 꼼꼼히 들여다보자면, <접속> <조용한 가족> 등 기획력이 돋보이는 대중영화로 안정된 브랜드 네임을 굳혀온 명필름이, 상업적 가능성보다 대안적인 영화를 고민한 흔적의 결과이기도 하다. 남북 분단이라는 가볍지 않은 소재와 기획의 충실함, 대중적인 재미를 적절히 안배한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을 전후로, 명필름의 필모그래피는 ‘웰 메이드’ 상업영화에 저예산의 실험, 영화의 주요관객인 20대의 취향에 갇히지 않는 소재, 작가적 개성을 존중한 시도로 운신의 폭을 넓혀왔다. 이러한 시도 뒤에는 심재명 대표의 기획력과 함께 그의 부군인 이은 감독의 뚝심이 버티고 있다.

이은 감독이 제작을 추진중인 것으로 최근 알려진 <아리랑>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아리랑>은 님 웨일즈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1920∼30년대 일제 치하에서 중국 공산당에 들어가 독립투쟁을 하다가 간첩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조선인 독립혁명가 김산의 족적을 따라가는 작품. 정지영 감독이 연출할 이 영화는 2003년 연말 완성을 목표로 개발 단계다. 시대극에, 이념과 정치적 격변기에 휩쓸린 인물의 삶이라는 다루기 쉽지 않은 소재로 다시 조금은 낯선 영화의 시작을 준비하는 이은 감독을, 혜화동 명필름 사옥에서 만났다.

-지난 1월23일까지 <아리랑>의 사전답사를 위해 중국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그렇다. 지난해 12월에 이미 광주, 연안 등으로 1차 답사를 다녀왔고, 1월17일부터 23일까지 1주일간 2차 답사를 다녀왔다. 정지영 감독, 김석만 교수 등 아리랑 개발팀과 함께 베이징, 상하이, 선양 등 김산이 걸었던 길을 따라가본 것이다. 베이징, 상하이스튜디오도 보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영화화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수많은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이건 해야 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처음 <아리랑>을 읽은 게 80년대 후반이었나? 장산곶매 시절이었으니까. 그때야 중국 공산주의 운동도, 동북아 정세도 잘 몰랐고, 우리 아버지 세대에도 이런 진보적인 지식인이 있었구나, 이렇게 세상을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게 충격이었다. 우리 세대가 할 필요가 있는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그 사람 자체 때문이었던 것 같다. 김산이란 캐릭터. 그 세대에는 참 구체적인 얼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생하게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는 반가움. 이제는 동북아 정세도 1930년대와 별다를 바 없고, 뭔가 잃어버리고 살아왔다는 생각 때문이다. 북한은 좌익화, 남한은 우익화된 채 살아온 사이에, 그런 것을 떠나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아리랑>을 영화로 만들 만한 여건과 때가 있다면, 지금이 그때가 된 것 같다. 사회적인 분위기도 달라졌고, <…JSA>도 성공적이었으니까. <…JSA>를 거쳐온 것이 <아리랑> 프로젝트의 제작자로 나서더라도 어느 정도 신뢰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블랙잭> 이후 한동안 연출작이 뜸했던 정지영 감독에게 연출을 맡겼는데.

=연출자에 대한 고민을 오랫동안 했는데, 정지영 감독님은 우리 영화인들 중에서도 제일 김산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참 존경스럽다. 굽히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영화인 예술인으로서의 자세가. 그래서 지난해 2월 베를린에 갔다 오자마자 집으로 찾아가 얘기를 했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가끔 점도 보고 그러는데,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죽는 영화를 해야 되나보다고, 그게 숙명인가보다 그러시더라. (웃음) <하얀 전쟁> <남부군>도 그랬고, <아리랑> 전에 준비하던 정신대 문제에 대한 영화도 그렇고. 그리고 김석만 교수님을 전주영화제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아리랑>을 연극으로 하고 싶어서 희곡을 쓰고 있다고 들었다. 이미 중국 옌안에도 다녀오고, 연구와 준비가 된 분이었다. 나중에 다른 작가가 붙더라도, 초고는 그분이 쓰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시나리오를 맡겼다.

-현재 진행상황과 일정은.

=중국 갔다 와서 1월27일부터 김석만 교수가 시나리오 집필을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워크숍을 할 때부터 영화에서 님 웨일즈의 위상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전체적인 형식은 어떻게 할 것인지 계속 의논중이다. 주관적인 영웅담보다는, 동북아 정세라는 객관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 얘기를 풀어갈 것 같다. 주무대가 상하이, 베이징, 광주라 중국에서 다 찍을 예정인데, 베이징스튜디오나 상하이스튜디오 중 한쪽이랑 하게 되겠지. <무사> <아나키스트> 등 이미 중국 현지 로케이션을 한 전례들이 있어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무사>가 순제작비 50억원 넘게 들었는데, <아리랑>도 50억원 이상을 예상하고 있다. 국내에서 절반 정도만 투자, 회수하면 나머지 절반은 해외 판권계약으로 회수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지금 생각으로는 내년 초쯤 촬영에 들어가면 연말쯤 개봉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섬>부터 <와이키키 브라더스> <욕망> <아리랑>까지 상업성보다는 소재의 의미나 대안적인 영화를 고집해왔다. 때론 내부의 반대의견도 있었을 것 같다.

=글쎄. 반대를 무릅쓰고 제작한 건 <섬> 정도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심재명 대표도 시나리오를 본 뒤에는 제작에 동의했다. <아리랑>도 아직까지 큰 반대는 없고, 하고자 하는 것들을 지지해주는 편이다. 명필름 초기의 영화들이 생존하기 위해서 한 거라면, 지금은 서로의 개성을 갖고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영화들은 내가 할 수 있는 영화들이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로서 사회적인 영화들이나, <욕망> <와이키키 브라더스>처럼 나이든 세대의 인간관계, 성, 불륜과 애정, 허위의식과 진실, 뭐 그런 것들에 관심이 간다. 장사는 몰라도 내 스스로에게는 꽤 의미가 있는 영화들이다. 그렇다고 예술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손해봐도 된다, 는 아니다. 투자가 되면 회수해야 한다. 내 돈이건, 투자자의 돈이건, 계속 못해내면 결국 재생산이 안 될 테니까.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장르영화를 못한다는 것은 딜레마라면 딜레마다. 하지만 40대 후반, 50대가 되도록 20대에 맞는 영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임권택 감독님이 영화를 하는 것처럼, 나도 내 세대에 맞는 영화를 하고 싶다. 기왕 내가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영화에 담아야지, 그래야 자기가 하는 예술로부터 자기가 소외당하지 않는다. 물론 시장성을 잃으면 제작이나 기획은 그만 해야겠지. (웃음)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극장상영만으론 결국 손해를 봤다. 이은 감독과 같은 동세대 관객이 그만큼 널리 있다고 보는 건가.

=내 세대들이 보고 싶어하는 영화가 있다고 아직 믿는다. 동세대뿐만 아니라 결국 동시대사람들 다수가 반기는 그런 영화가. 반드시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너무 그러면 건방져 보이니까 안 되면 떠나야지, 그러고 있다. (웃음) <욕망>과 <아리랑> 사이에 임상수 감독의 <마지막 연애의 상상>(가제)을 하자고 얘기중인데, 그렇게 3편까진 해보고 판단할 거다.

-연출을 다시 할 생각은 없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이후 오래 쉬었는데.

=쉰 게 아니라 앞으로 시작해야지.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은 조직의 명령에 따라서 한 거고. (웃음) <아리랑> 제작이 끝나고 나면 생각해볼 거다. 연출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사고도 다르게 하고, 다른 눈으로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지난해에 <와이키키 브라더스> 1편을 개봉한 것에 비해 올해 명필름의 라인업이 전례없이 많다.

=지난해에 개봉된 영화는 <와이키키 브라더스> 1편이지만, 올해 영화 중 거의 4편을 완성했으니 바쁘긴 매한가지였다. <버스, 정류장>이 곧 개봉인데, 낯설고 두렵고 그런 건 있다. 드라마에 강약이 적고, 대형스타가 없는데다 전형적인 장르영화가 아닌데 어떻게 받아들일지. <욕망>도 뭔가 새롭고 재밌는 게 나온 것 같긴 한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는 고민이다. <YMCA 야구단>이나 디엔딩닷컴의 <후아유>는 그런 대로 상업적으로 기대되는 영화고. 그 밖에 우리가 투자와 배급을 맡은 청년필름의 <질투는 나의 힘>과 라이트하우스의 <이클립스>가 있고, 이픽처스에서 공동투자한 지아장커의 새 영화가 완성된 상태고, 역시 이픽처스에서 조선족 감독 장율의 <청춘만세>를 제작 준비중이다. 임상수 감독의 영화까지 하면, 올해 라인업이 9편인가.

-CJ엔터테인먼트에 이어 코스닥 등록을 준비중인데, 어떤 변화를 가져올 거라고 보나.

=3월에 신청해서 여름쯤 등록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물론 심사를 통과한다면. 등록 뒤에 들어올 자금 규모에 맞춰 급히 계획을 짜고 있진 않기 때문에 당장 영화를 만드는 데 큰 변화는 없을 것 같다. 들어오는 대로 여유있게 쓸 순 있겠지. 어쨌든 영화사도 기업인 만큼 안정적인 자금 확보는 중요하다. 코스닥에 등록되면 여러 가지로 안정되겠지. 올해를 거치면서 명필름이 작은 프로덕션에서 한국영화가 산업화되는 과정에 한 부분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제작사로서 명필름이 어떤 브랜드 네임을 갖길 바라나.

=<질투는 나의 힘> <욕망> 둘 다 그렇지만, 뉴스 뒤에 나오는 TV드라마 같은 영화들이다. 다만 TV에서 표피적인 이야기만 보여준다면, 내면이 있다는 게 다르다. 그런 개성이 있고, 어떤 것이든 정성이 들어 있는 것.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의 느낌과 마케팅 단계, 비디오나 DVD로 나온 걸 봤을 때 등등 뭐든 그때그때 다른 질감…. 시장에서 매출액이 얼마인지는 큰 관심이 없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더라도 독자성 있으면서 완결성 있는 영화들을 만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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