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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 인터뷰] 서울독립영화제의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김동현 집행위원장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 폐막식 현장에서 조영각 집행위원장이 ‘굿바이 인사’를 전했다. 2002년부터 집행위원장으로서 서독제를 이끈 그에게 독립영화인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이제, 조영각 다음이다. 독립영화인들의 시선은 이미 김동현 서독제 부집행위원장 겸 사무국장에게로 향했다. 조영각 전 집행위원장도 “김동현 집행위원장 체제에서 영화제의 안정적인 운영 못지않게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주길 기대한다”는 애정의 조언을 전해왔다. 주변의 기대도 크다. 강릉 독립예술극장 신영과 정동진독립영화제의 박광수 프로그래머는 “워낙에 꼼꼼한 사람이다. 행정가들과의 협업에 그 누구보다 능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만의 스타일을 구축해가길 바란다”고 전했다. 여성 집행위원장에 대한 지지와 응원의 말도 이어졌다. 제작사 딥 포커스의 안보영 프로듀서는 “강릉시네마테크 활동부터 서독제까지 독립영화의 역사를 꿰고 있는 영화인이다. 김동현 선배의 행보가 후배 여성 영화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김동현 서독제 신임 집행위원장 예정자를 미리 만나 서독제 이야기와 함께 독립영화 활동가 김동현 스토리를 들어봤다.

-‘집행위원장직을 맡는 일은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보자’는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이제는 더이상 피할 수 없겠다 싶었던 건가.

=집행위원장직은 잠정적인 확정이라고 해두자. 정말 미루고 미뤘다. 조금은 지쳐 있어서 지지난해에 안식년을 가졌다. 그때 나 개인의 비전과 조직으로서의 서독제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선후배들과 여러 차례 얘기를 나눠본 결과, 누군가가 서독제를 새롭게 이끌고 가야 한다면 오랫동안 서독제에서 일한 내가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 특히나 후배들의 말이 힘이 돼줬다. ‘떠나지 말고 선배가 꼭 서독제를 이끌어줬음 좋겠다, 많이 돕겠다’는 말들이 이어졌다. 지난해 사무국장직과 부집행위원장직을 겸하게 됐다.

-집행위원장이 되는 공식적인 절차는 어떻게 되나.

=독립영화계는 (감투를 쓰는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보니 마음먹고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는 거다. (웃음) 공식 절차는 이렇다. 1월 중순쯤 서독제 집행위원회가 열리는데 그때 집행위원장 임명건이 안건 상정된다. 서독제의 주체 단체가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다. 그곳의 의결 기구인 중앙운영위원회에도 이 안건이 상정된다. 내가 공약을 제시하고 최종 의결을 받는다. 2월 말 정도면 협회 총회를 통해 전체 회원들에게 이 건이 보고될 예정이다.

-서독제 일은 언제부터 한 건가.

=2006년 프로그램팀장으로 첫 인연을 맺었다. 물론 그전부터 이미 서독제의 관객이었다. 고향인 강릉에서 회사 다니면서 강릉시네마테크 활동을 했다. 그러면서 1998년에 정동진독립영화제를 만들었고 2005년까지 꾸려나갔다. 영화제를 하면서 서독제 사람들도 알게 됐다. 정동진독립영화제 1, 2회 때인 1998, 1999년만 해도 영화제 프로그램은 서울의 한독협이 준비해왔다. 그때 조영각 선배도 알게 됐다. 3회 때부터는 정동진독립영화제가 직접 주최가 돼 영화제를 운영했다. 당시 정동진독립영화제 사무국장 일을 했다. 이후 2006년에 본격적으로 거주지를 서울로 옮겼고 직업적으로 독립영화 활동가 생활을 시작했다. 서독제 사무국장은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했고. 나름 서독제의 실세였던 셈인가. (웃음)

-강릉 독립예술극장 신영의 박광수 프로그래머도 강릉시네마테크 후원 회비를 내라는 동네 친구 김동현의 꾐에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고 하더라.

=내가 한국 독립영화계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를 알아봤구나. 그때까지만 해도 (박)광수가 이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웃음) 지금은 그가 정동진독립영화제를 거뜬히 이끌고 있지 않은가.

-독립영화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나.

=1990년대 중반 서울에는 문화학교 서울이, 지역 광역 단위에는 시네마테크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강릉에는 강릉시네마테크가 생겼다. 문화학교 서울에서 VHS 테이프로 카피에 카피를 거듭한 조악한 화질의 예술영화들을 공수해와서 보고 영화에 대한 글도 쓰고 사람들과 영화 세미나도 하고. 나를 포함해 당시 시네마테크 활동을 했던 친구들 대부분이 연출 등 창작 기반이 아니었다. 대신 상영과 영화제 기획에 관심을 기울였다. 정동진독립영화제, 인권영화제 등을 만들어서 다른 지역 영화인들과의 교류의 끈을 만들어나갔다. 그게 시작이었다. 삶에 대한 내 지향과 독립영화의 독립정신이 잘 맞기도 했다. 이후 큰 규모의 서독제 일을 하다보니 매뉴얼화된 행정 업무를 따라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면서 정동진독립영화제 때 내가 정말 일을 막 했구나 싶더라.

-조영각 전 집행위원장과는 10년 동안 호흡을 맞췄다. 선배 조영각으로부터 들은 당부나 조언의 말이 있나.

=나 말고도 다른 활동가들도 영각 선배와 함께했지만 햇수로만 따지면 내가 압도적으로 오래했더라. 내가 지구력이 있나? (웃음) 그전부터 친한 선후배 사이였다지만, 일을 하다보면 왜 위기가 없었겠나. 술도 같이 많이 마시고 선배한테 내가 편지를 쓰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조언과 비판을 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사람들이 ‘서독제의 세대 교체’라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선배와 내가 함께한 시간이 이만큼 상당한데. 계속 선배한테 많이 묻고 조언을 구할 생각이다.

-한독협 중앙운영위원회에는 어떤 공약을 내걸 계획인가

=조영각 선배는 ‘독립영화 하면 조영각’이라는 브랜드 파워가 있지 않나. 개인의 역량으로 영화제를 꾸려나간 면이 상당했다. 반면 나는 실무자 출신이다. 독립영화계는 창작자인 감독은 많은데 기획자나 정책 실무자가 많지 않다. 있다 해도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워낙 결과로서 돌아오는 피드백이 적다. 내 경험을 살려 실무, 정책, 기획 파트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 좀더 힘을 실어주며 함께 만들어나가겠다. 영화평론가들뿐 아니라 영화계 외 다른 진영에 있는 기획자들과도 교류해나갈 계획이다.

-여성 집행위원장이라는 점에서도 여성 영화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독립영화계는 창작자가 아닌 이상 여성 활동가들이 상영, 배급, 영화제 업무의 상당 부분을 소화한다. 남성 영화인들이 일을 벌이고 치고 나가는 쪽이라면 여성 활동가들이 그 일을 마무리짓고 실질적인 성과를 내왔다. 그런 면을 높이 평가한다. 후배 여성 활동가들에게 내가 하나의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도록 해야지. 내 꿈은 집행위원장직을 오래 하는 건 아니다. 집행위원장으로 누가 오더라도 거뜬히 해낼 수 있게끔 안정적인 영화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거다. 그래야 나도 새로운 일을 도모하지. 독립영화가 상업영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방안도 연구할 생각이다. 나는 압박받으면 도망가기보다는 그런대로 해내는 편이다. 그러니 후배 영화인들은 나를 계속 압박해달라.

-지난해 서독제에 대한 자체 평가가 진행됐을 것 같다.

=지난 몇년간 규모를 조금씩 키워왔다. 특히 지난해는 상영관을 하나 더 늘려 5개가 됐다. 무엇보다 전체 관객이 1만명을 돌파해 역대 최다 관객을 기록했다. 유료 관객만 1500여명 늘었으니. 적은 인원의 사무국 스탭들이 안정적으로 잘해냈다는 증거다. 부족했던 건 젠더 이슈와 관련된 부분이다. 영화제가 젠더 이슈에 둔감했던 건 전혀 아니다. 영화제 스탭의 90% 이상이 여성이고 영화 심사 과정에서도 여성 쿼터를 지향해왔다. 토크 포럼으로 ‘#STOP_영화계_내_성폭력: 영화계 성평등 환경을 위한 대안 모색’도 열었다. 하지만 개막식 공연 밴드의 노랫말에 문제가 있었던 건 내부에서 좀더 세심하게 챙기지 못한 부분이다. 다른 영화제들과 논의해 관객과 영화인들이 만나는 대규모 행사인 영화제에서 젠더 이슈를 논할 수 있는 지점이 뭔지를 논의하고 필요하다면 매뉴얼화해두려 한다.

-서독제는 사전 제작 프로젝트인 ‘인디트라이앵글’로 <원나잇 스탠드> <나나나: 여배우 민낯 프로젝트> <서울연애> <오늘영화> 등을 제작, 개봉해왔다. 독립영화답게 통통 튀는 개성 있는 작품들이었기에 다음 라인업도 기대된다.

=지난해 공모를 통해 정해성 감독의 <영 피플 코리아>의 제작을 결정했다. 추가로 한편 더 받을 생각이다. 감독님들도 제작, 배급, 개봉의 전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제작비 2천만원 정도로 두세편의 단편을 만들고 개봉한다는 게 만드는 입장에서는 너무도 고통스럽다. 지난해 서독제 사무국이 2년 만에 직접 마케팅까지 진행하며 <사돈의 팔촌>을 개봉했다. 개봉 전, 스탭 후배들이 “관객이 2천명만 들어도 좋겠다”고 걱정하더라. 내가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멜로영화다. 포스터만 만들어서 극장에 걸어도 2천명의 관객은 거뜬히 들 것”이라고 호언했다. 웬걸. 1천명을 넘기까지도 굉장히 어려웠다. 아무리 소규모 개봉이라고 해도 2~3년 사이에 극장 상황이 더없이 힘들어진 거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독립영화의 지원 사업에 제한과 탄압이 있었다. 그 와중에 독립, 예술영화 전용관들이 도산하지 않았나. 독립, 예술영화 극장이 있고 없고가 독립영화 개봉 때 큰 차이로 나타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시급히 독립 예술영화 전용관이 복원돼야 한다. 독립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관객의 발길을 계속해서 잡아둘 수 있는 공간의 확보가 꼭 필요하다.

-‘행정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독립영화계와의 갈등의 골이 깊어진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갈 계획인가.

=서독제는 한독협과 영진위가 공동 주체로 진행하는 사업이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 농단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존재가 드러난 와중에 치러진 지난해 영화제 때는 사실 마음이 굉장히 복잡했다. 영진위와 함께 영화제를 만들어가는 게 맞나 싶더라. 그럼에도 1999년 영진위 출범 당시 영진위가 처음으로 진행한 사업이 서독제인 만큼 그 상징성을 희미하게나마 가져가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 독립영화계와 정부 사이의 논의의 테이블들이 거의 사라졌다. 다시 힘을 내 영진위에 좀더 적극적으로 정책 지원을 요구해갈 생각이다.

-<씨네21> 국내뉴스 지면의 ‘한국영화 블랙박스’ 코너의 새 필진으로 합류하기도 했다.

=독립영화 정책을 공부하는 끈을 놓지 않게끔 자극이 돼주고 있다. 좀더 센 발언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마음을 담대하게 먹고 더 잘 써나가겠다. 여러모로 내게는 시험대가 될 한해다. 절대로 혼자 죽지 않을 거다. (웃음) 그러니 독립영화인들 모두 나를, 또 서독제를 많이 도와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