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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기밀> 배우 김상경, "보수와 진보가 함께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임수연 사진 백종헌 2018-02-01

2002~2003년 당시 김상경의 필모그래피는 두고 두고 회자될 만하다. 첫 주연 영화가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2002)이고, 그다음 작품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이니 말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는 영화에 집중하기보다 종종 드라마에 출연하며, 과거의 기세를 이어가지 않은 김상경의 이후 필모그래피가 충분히 아쉬울 수 있다. 하지만 지난 십수년간 이어진 그의 행보를 모아보면 쉬운 예상을 벗어나기에 되레 신선한 면이 있다. <내 남자의 로맨스>(2004) 같은 로맨틱 코미디나 사극 드라마 <대왕 세종>(2008), 주말극 <가족끼리 왜이래>(2014)에 어떤 일관성이나 두드러지는 파격은 없다. 하지만 <생활의 발견>과 <살인의 추억>으로 이어지는 전성기와 만나면 재미있는 돌출이 된다. 국방부 방산 비리를 폭로한 내부고발자 박대익 중령을 연기한 <1급기밀>로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그를 만나, 지나온 궤적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1급기밀>은 촬영도, 개봉도 지연이 많았던 작품이다. 고 홍기선 감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게 2016년 봄이었는데, 실제 촬영은 9월에 들어갔다.

=박근혜 정부 시절 방산 비리를 척결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영화에 참 잘됐다고 생각했다. 친정부적이니 정부의 지원이 많지 않겠느냐며. 그런데 모태펀드 투자를 못 받아서 촬영에 못 들어간다는 거다. 왜 정부에서 지원을 안 해주지? 정부에 좋은 얘기 아냐? 방산 비리 문제라서 안 된다 어쩐다. 이 소재가 좀 그런 거 같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물론 이전 다른 정부, 심지어 조선이나 고려시대에도 항상 방산 비리가 있었다.

-정치적 진영과 상관없이 잔재하고 있던 문제라는 거네.

=이건 보수나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새 정부 들어서면서 적폐청산이다 뭐다 하지만 <1급기밀>은 그런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 <화려한 휴가>(2007)도 당시에 700만명 넘는 흥행을 했는데도 시상식에서 외면받는 것을 보면서 아직 사회에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남아 있구나 하고 느꼈다. 고 홍기선 감독이 그동안 사회파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지만 이번 영화는 유일하게 보수와 진보가 함께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여당 대표와 야당 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을 가운데 두고 손잡고 볼 수 있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1급기밀>은 군을 위한 영화다. 대다수 군인은 충성심이 강하고 나라를 위해 살고 있는데 다만 소수의 사람들이 비리를 저지르는 거다. 그런데 그 소수가 너무 높은 자리에 있어서 문제가 된다더라.

-우여곡절 끝에 촬영에 들어갔던 영화가 개봉도 밀리게 됐다.

=쫑파티를 2016년 12월에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박근혜 정부 시절에 후반작업에 들어갔을 거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이 탄핵되고 정권이 바뀌었다. 그리고 감독님이 안타깝게 작고하셨다. 그래도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영화를 공개했을 때 관객 반응이 좋아서 제작진이 더 열심히 해야겠다며 상당히 고무된 상태였다. 지금도 언론에선 소재가 주는 의미가 있으니 리뷰를 좋게 써준다. 아무래도 배급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알 수 없는 힘들이 영화의 이슈화를 방해하려고 할까봐 그게 좀 걱정스럽다.

-개봉 전후에 엄청 센 블록버스터는 없지 않나. 좀 떨어진 설 연휴에 박 터지게 싸우는 분위기던데. (웃음)

=그냥 <1급기밀>이 손익분기점만 넘겼으면 좋겠다. 그정도 숫자만 가도, 파급효과는 충분히 있을 거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상처받지 않고 말이다.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어렵다고 느껴지는 소재 아닌가. 방산 비리를 다룬 최초의 영화가 나왔다는 의미에서 이미 70~80%는 이뤘다고 본다.

-미리 정해둔 시나리오가 없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제외하면 캐릭터의 자서전을 쓰면서 준비하는 타입이다. 실제 사건을 다룬 <1급기밀>도 그랬나.

=난 고전적인 의미의 배우다. 대학교 때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 리 스트라스버그의 액터스 스튜디오 같은 오래된 것부터 배워온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연기를 하더라도 그 인물을 만든다. 전사를 잘 쌓아놓을수록 캐릭터도 튼튼해진다. 시나리오에 있는 에피소드와 인물 설정을 기반으로 해서 출생부터 성장과정까지 영화에 부합하게끔 일종의 자서전을 썼다. 영화에는 와이프와 박대익의 관계가 등장하지 않지만 둘이 어떻게 사귀다가 언제쯤 결혼하고 애를 낳았는지 내가 쓴 소설에는 나온다. 아무래도 실제 인물을 차용한 영화이기 때문에 김영수 소령의 이야기를 많이 참고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야 “그래, 저런 게 정의지” 하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인생이 걸린 문제다. 박대익 중령이 방산 비리 고발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를,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뭐라고 봤나. 직접 썼다는 소설에도 그 단서가 있을 텐데.

=김영수 소령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물어봤다. 근성 있고 명예에 살고 죽는 사람이더라. 말도 안 되는 비리나 청탁을 받으면 즉시 신고하고, 원리 원칙대로 살아왔다. 처음에는 방산 비리를 보고한 것에 대해 본인이 표창을 받고 승진할 줄 알았다고 했다. 그 뒤에 큰손이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예상과 달리 군에서 문제를 덮어버리려고 하니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낀 것 같았다. 자신을 군인으로서 폄하하고 군인으로 올바르지 못한 사람처럼 취급하는 게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고. 그래서 군복을 벗는 일이 있더라도 명예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더라.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도 싸우고 있다.

-막판에 박대익이 군 간부들과 맞닥뜨리는 장면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그때 왜 눈물을 흘린 것 같나.

=시나리오에도 ‘울분을 토로한다’ 정도로만 묘사되어 있었지 눈물을 흘린다는 내용은 없었다. 억눌린 분노에 대한 눈물이었던 것 같다. 딱 두 테이크 갔던 장면이다. 첫 테이크에서 바로 오케이를 받았는데, 너무 운 게 아닌가 싶어서 이걸 참으면서 해보겠다고 한번 더 찍자고 했다. 그런데 영화에는 첫 번째 테이크가 쓰였다.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무래도 눈물을 참으려고 했던 두 번째 테이크가 오히려 연기 같고 불편했을 거 같다. 21년 동안 영화를 하면서 한번도 눈물을 흘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연기한 적이 없다. 역으로 시나리오에 눈물을 흘린다고 적혀 있어도 실제로 연기할 때 눈물이 나지 않았다면 그 연기가 진짜다. 영화를 쭉 찍어오면서 느낀 감정이 있으니까.

-인물의 자서전을 쓰며 철저하게 캐릭터를 분석한 후 배우가 실제 느끼는 감정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그렇게 연기해왔다. 그런데 배우로서는 거의 미리 정해둔 것 없이 촬영에 임하는 홍상수 감독과도 꽤 많은 작품을 했다.

=드라마로 데뷔해서 3년 정도 연기했을 때 엄청난 권태에 빠져 있었다. 지금이야 드라마가 훌륭하지만 예전에는 이야기가 다 똑같았다. 내가 하는 역할도 검사, 변호사, 부잣집 아들로 비슷하고. 그럴 때 홍상수 감독이 만나자고 했다. 시나리오를 보자고 했더니 시나리오가 없다고 하고, 뭐 찍은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오! 수정> <강원도의 힘>…. 정상적인 제목이 아니지 않나. (웃음) 그때 동물적인 감각으로 이 사람이 나에게 새로운 것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두 가지는 완전히 별개의 연기다. 형식 자체가 다르다. 잘 짜여진 텍스트를 갖고 집중해서 하는 연기도 있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튀어 나와서 오감을 모두 살리며 하는 연기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원래 사람이 어느 지점까지 가면 고집과 틀이 생기게 되어 있다.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연기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떤 틀에 갇히지 않게 된 거 같다. 사실 시나리오가 없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틀을 깨는 거였고. 이렇게도 영화가 되는구나,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싶었다. 실제로 술을 마시고 연기를 하니까 내가 그전까지 했던 술 먹는 연기가 다 거짓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다음에 했던 <살인의 추억>은 봉준호 감독이 만든, 아주 잘 짜여진 텍스트를 갖고 한 연기다. 이런 두 영화를 만날 수 있어서 나에게 어떤 이미지가 생겼고, 지금까지 밥 벌어먹을 수 있게 영화를 찍으며 살고 있다.

-<극장전>(2005)과 <하하하>(2009) 이후에는 홍상수 감독과 함께한 작품이 없는데.

=너무 좋은데, 너무 힘들다. <생활의 발견> 때는 안 해 본 연기였으니까 그냥 재미있었다. 그땐 젊어서 술도 많이 마실 수 있었고. <극장전> 때부터는 전과는 다른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느껴지더라. 그래서 <하하하> 끝나고 감독님과 얘기했다. 우리 60 넘어서 다시 하자고. (웃음)

-<살인의 추억>을 함께한 봉준호 감독과도 연락을 하고 있나.

=지난해에 나도 감독님도 부친상을 치러서 그때 얼굴을 봤다. 명절 때 문자하는 정도다. 홍 감독님처럼 봉준호 감독님도 내 인생에서 너무 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배우는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받는 사람이다. 나 역시 봉 감독님과 만나 또 작품을 하고 싶다. 홍 감독님과는 영화를 세편 같이 하면서 감독님의 변화를 내가 안다. 봉 감독님과는 <살인의 추억> 이후 만난 적이 없다. 요즘은 현장에서 어떤지 궁금하다.

-그간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생활의 발견> <살인의 추억> 이후 1년 정도 영화를 안 했다.

=당시에 왔던 시나리오의 70~80%가 형사 역할, 나머지는 홍상수 스타일을 따라한 것이더라. 진짜를 해봤으니 아류는 할 수 없지 않나. 예전에 차승재 당시 우노필름 대표가 이런 조언을 해줬다. 네가 지금 몰라서 그렇지 운이 너무 좋다, <생활의 발견>은 예술영화 쪽에서 최고작이고 <살인의 추억>은 상업영화의 끝이다, 이런 작품은 다시 나오지 않는다고. 이런 두 영화를 했으니 다른 영화가 눈에 안 들어올 텐데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영화를 하지 못할 거라더라. 그 말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난 송강호나 하정우가 아니다. 후회하지 않는 건 서로의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꾸준히 드라마 출연도 병행하고 있다. <가족끼리 왜이래> 같은 주말드라마도 찍고. 영화로 어떤 정점을 찍어본 배우에게는 의외의 행보다.

=우리 엄마나 엄마 친구들은 영화를 보지 않으니까. <생활의 발견> 당시 홍상수 감독님과 약간 싸운 적이 있다. 경주 골목 장면을 찍을 때 시장 아주머니들이 날 보면서 옛날에 출연했던 드라마 속 이름으로 불렀다. 그래서 앞으로 나랑 영화만 찍자고 했던 감독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칸국제영화제도 가고 감독님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지만 저분들은 평생 감독님 작품을 보지 않을 거라고. 저분들의 유일한 삶의 낙은 매일 저녁 8시 반에 하는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라고. 그런 의미에서 만듦새가 어떠하다고 해서 폄하되어야 할 게 아니고, 감독님 영화도 TV드라마도 똑같이 훌륭하다고 말이다.

-드라마를 찍다가 영화판으로 넘어간 후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배우들은 드라마 촬영현장의 고충에 대해 언급한다. 상대적으로 더 급박하게 진행되는 게 배우에게 더 힘들 수 있는데 드라마를 계속 하는 이유는.

=난 그게 직업윤리라고 생각한다. 날씨가 춥다고 일을 안 할 수는 없지 않나. 배우는 날 봐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는 거고, 그러면 나가야 한다. 난 드라마로 데뷔한, 태생이 드라마인 사람이다. 드라마를 찍다가 영화로 넘어와서 영화가 잘되면 드라마를 안 하고, 영화가 좀 안 되면 드라마로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난 정확히 반대로 갔다. 영화가 잘될 때 오히려 드라마를 했다. 난 속칭 스타 배우가 아니지 않나. 난 그냥 일상의 사람들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서 일반인이 두루 많이 보는 드라마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드라마가 가진 미덕도 영화가 가진 미덕도 있다는 건데.

=그런데 요즘은 영화의 미덕이 많이 사라진 것 같다. 오히려 TV만 못할 때가 있다. 예전에 할리우드의 상투적이고 장사만 하려는 영화들을 보면서 “저러다가 나중에는 배트맨과 슈퍼맨이 같이 나오는 영화도 만들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어벤져스>(2012) 같은 작품이 진짜로 나와서 기가 막혔다. 근데 한국이 또 그걸 따라한다. 그런 슈퍼히어로들이 나오지 않을 뿐이지 비슷한 구조로 영화를 만들지 않나. 거대 자본을 투입해 배우들을 옴니버스식으로 출연시킨다. 내가 보기엔 그 배우들이 모두 영화 한편의 주인공감인데 말이다. 그러고는 2천개 가까운 스크린에 영화를 깐다. 원래 한국에서 가능한 천만 영화의 숫자가 있지 않나. 인구 대비로 봤을 때 천만 영화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건 말이 안 된다. 고르게 모든 영화를 볼 수 있는 구조에서는 100억~200억원 들어가는 영화로 천만 관객을 만들 수가 없다. 무조건 다른 영화가 상처를 받아야 가능한 숫자다. 지금의 천만이라는 숫자는 대단하다고 축하할 일만은 아니다.

-그러한 영화계의 분위기가 작품의 만듦새에도 영향을 준 것 같나.

=천만명이 볼만한 영화를 목표로 하니 소재도 다 비슷해진다. 그러다보니 중간의 이야기가 없어진다. 요즘은 OCN이나 tvN 드라마 소재가 훨씬 더 다양하고 영화적이다. 정작 영화는 영화답지 않다. 옛날에는 컷수도 적고 여유가 있었다. 관객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거다. 예전에는 액션영화의 컷이 3천개 정도였는데 요즘은 드라마도 3천컷이 훌쩍 넘는다. 액션영화는 7천개가 넘어갈 때도 있다고 들었다. 이건 TV 드라마보다도 컷이 많은 거다. 요즘 어떤 극단을 본 거 같다. 그래서 오히려 향후 2~3년 안에 영화계가 큰 변화를 마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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