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커버스타
<덕구> 이순재, "배우는 자기가 다 울면 안돼"
이주현 사진 오계옥 2018-03-20

<덕구>라는 영화로 이루어진 만남이지만, 배우 이순재는 자신의 60여년 연기사를 정확한 기억력으로 들추어내며 원로배우가 들려줄 수 있는 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대화는 정치, 사회, 역사, 문화를 폭넓게 오갔다. 어떤 맥락의 대화에서도 배우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또렷이 읽혔다. 그 자부심과 책임감은 곧잘 후배들에 대한 쓴소리로, 개성을 잃어버린 고만고만한 한국영화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로 이어졌다. 그에게 연기는 오락도 아니고 돈벌이의 수단도 아니다. 오롯이 예술이다. 그러니 그 예술을 탐구하는 자세에 타협은 없다. <덕구>에서 어린 손자, 손녀를 돌보는 시골의 늙은 할아버지 ‘덕구 할배’를 연기하는 일도 언제나 그렇듯 그에게 새로움을 창조하는 작업이었다. 이순재의 거칠한 맨 얼굴과 아이들의 천진한 얼굴에 눈물이 맺히는 장면을 볼 땐 크게 심호흡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 순간에도 절제를 아는 대배우의 연기는 감탄을 절로 불러일으킨다.

-오늘(3월 6일) <덕구>의 촬영지였던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시사회와 무대인사가 있었습니다. 고령에서 방금 올라오신 길인데, 사람들 반응은 어땠나요.

=영화는 같이 못 봤는데, 눈물바다가 됐다 그러더라고. 시나리오 볼 때부터 울컥했어. 생각만 해도 눈물나는 영화야. 촬영하는 동안 고령에서 도움과 지지를 많이 받아서 인사드릴 땐 계속 감사하다고 했어. 감사했지 정말.

-<덕구>는 이야기가 좋아 고민하지 않고 출연을 결정한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각본이나 시나리오를 볼 땐 이야기의 논리를 중요하게 보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영화를 보면 앞뒤 안 맞는 게 많은데, 이건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어. 감독이 누군지도 몰랐는데 시나리오를 잘 썼더라고. 가만 보니까 흐름도 괜찮고 앞뒤가 맞아. 우선 손주들을 데리고 사는 할아버지의 입장이 극히 자연스러워. 건강 문제로 더이상 손주들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입양을 고려하는 현실적 문제라든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이야기도 의미가 있었어. 그리고 결국은 감동이 중요해. 연극이나 영화나 TV드라마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감동을 주는 거라고. 그러면 감동은 무엇에서 우러나오느냐. 사랑, 인간 상호간의 사랑, 인간애야. 시대를 비판하고 뒤집어엎는 것도 결국 인간애가 바탕이 돼서 나온 호소이고 반항이란 말이지.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다룬 최근의 영화들을 보면 드라이하고 러프하고 강하기만 한 인상이 있어.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지만 좀더 다양한 영화들이 나올 필요가 있어. 그런 점에서 <덕구>는 모처럼 뻐근하게 울고 나올 수 있는 영화였지.

-개런티를 받지 않고 출연하셨습니다.

=작품성이 있고 해야 할 가치가 있으면 돈하고 상관없이 하게 돼. 예술이란 건 돈을 전제로 하는 게 아니거든. 우리 땐 연기로 돈 버는 건 할리우드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고. 당시 이 직종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하다, 하나는 생활에 절제가 없다, 이 두 가지였어. 당시 미투(#MeToo) 운동이 나왔으면 수십명 걸려들었을 거야. 그런데도 이 직종을 택한 것은 예술성에 대한 발견 때문이야. 좋은 작품에 출연해서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걸 다 표현하고 온당한 평가를 받으면 그게 하나의 보람이지, 돈하고는 꼭 상관이 없어. 돈 생각 하면 연극 못하지. 로렌스 올리비에가 평하길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고,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 했어. 그게 맞아. 연극이 배우의 예술이기 때문에 지금도 계속 하는 거야.

-<덕구>에선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합니다. 평소 말의 중요성, 언어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하시는데요, 사투리 연기에도 신경을 많이 쓰셨겠어요.

=경상도 본바닥에서 보면 뭐 저런 사투리가 다 있나 할 수도 있겠지. (웃음) 분명 사투리를 정확하게 표현해야만 하는 작품이 있는데 사실 이건 그런 영화는 아니었어. 그래서 지역성을 드러내는 정도, 그 뉘앙스만 유사하게 형성하면 되지 않겠냐 했던 거지.

-도시 중산층의 이미지, 엘리트 배우라는 이미지가 강한데 이번엔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 역을 맡았습니다. 시골의 정서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도 중요했겠습니다.

=연기라는 게 근접해가는 거거든. 그러다보면 리얼리티가 표현되게 돼 있어. 이 작품도 그렇게 했다고. 나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가 있긴 하지만 외려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연기하는 게 난 좋았어. 우리 마누라가 제일 질색하는 게 뒤통수 허옇게 나오는 건데, 머리도 염색이 다 빠진 채로 허옇게 나오고. 다 노출이 됐지. (웃음)

-상대 배우가 어린 아역들이었습니다. 성인배우와 연기할 때, 아역배우와 연기할 때 그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엔 걱정했지. 아이들이 중심인 이야기라. 근데 덕구(정지훈)이 녀석이 천재적으로 연기를 잘하더라고. 애들이 너무 잘하면 꾸며진 것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 녀석은 균형을 잘 맞췄어. 손녀로 나온 덕희(박지윤), 요것도 아주 물건이야. 대사도 별로 없는데 분위기를 잘 살렸거든. 촬영 현장 전체의 분위기도 살려주고. 추운데도 군소리 없이 잘 따라주고. 그리고 아역들과 연기할 때는 배려를 해야 돼. 애들이 할아버지인 나를 무섭게 생각하면 안 된단 말이지. 나를 편하게 생각하게 해야 돼. 나이 먹었다고 분위기 경직시키면 작업에 전혀 도움이 안 돼.

-실제로는 손주들에게 어떤 할아버지신가요. 가정교육은 엄하게 하셨을 것 같은데요.

=할아버지는 원래 무조건이야. 외손녀 외손자 둘 있는데, 이제 다 커서 손녀는 올해 대학 들어갔어. 근데 아들딸 교육은, 가정교육을 엄하게 할 시간이 없었다고. 자식들은 나와 함께한 기억이 많이 없을 거야. 애들 데리고 여행 갈 시간도 없었으니까. 대학에 들어가서 뜻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울대 연극반을 만들어 연극을 시작했고, 10년 동안 연극하면서 출연료는 거의 받아본 적이 없었어. 그러다 방송국이 개국하면서 용돈이라도 벌어 쓰려고 TV드라마를 시작했지. 초창기 TV드라마는 연극쟁이들이 접수했어. 배우고 연출이고 할 것 없이. 그러다 영화쪽에서 TV드라마 배우들을 불러서 캐스팅하기 시작했거든. 영화하면서 톱스타 소리는 한번도 들어본 적 없지만, 최고 7~8작품을 동시에 계약한 적도 있고 하루에 네편의 영화를 찍은 적도 있어. 그게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의 일이야. 20여일간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촬영을 하면 한달에 집에서 잠자는 시간은 1주일도 채 안 될 때가 많았어. 신혼 초에도. 그러니까 애들이랑 놀 시간이 없었던 거야.

-늙은 할아버지와 아직은 엄마가 그리운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라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 많습니다. 실제로 몇몇 장면에서 흘리는 눈물은 연기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찍으면서 고비가 많았지. 너무 눈물이 나와서. 그런데 배우는 자기가 다 울면 안 돼. 관객이 울 수 있게 만들어야지. 그래서 되도록 절제를 해야 돼. 서양영화를 보면 배우들이 웬만해선 안 운다고. 그냥 눈물을 흘리는 정도지 아이고, 아이고 오열하는 건 거의 없거든. 물론 동서양 정서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이번에도 흘러나오는 눈물을 절제하려고 했어.

-최근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라이브>에도 출연하고 계십니다.

=초반엔 많이 나오지 않고 후반에 가면 내 얘기도 좀 나올 거야. 지금은 경찰 지구대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후반 가면 가족이야기가 있을 거야. 알다시피 노희경 작가는 제대로 쓰는 작가니까 믿음이 있거든. 노희경 작가와는 <디어 마이 프렌즈> 때 인연이 닿을 뻔했어. 그런데 김수현 선생 작품하고 시기가 겹치는 바람에 아깝게 못했지. 그래서 이번엔 무조건 하기로 했고. 그런데 <라이브> 첫주에 내가 한신 나왔는데, 노희경 작가가 ‘선생님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더라고. 한신만 나와도 상관없다고, 당신 작품은 한신이라도 참여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지. 요즘은 워낙 막장 드라마도 많고, 배우의 연기를 잘 이끌어내는 좋은 연출자도 드물잖아. 시대극도 문제가 많아. 나라를 근심하는 왕은 없고, 신하는 전부 간신이고, 궁 안의 여자들은 전부 요부들이고. 우리가 그런 민족이 아니란 말이야. 예전엔 정말 멋있는 시대극도 많았는데 말이야.

-<사랑해요 당신> <앙리할아버지와 나> 두편의 연극으로 곧 무대에 서시는데요, 정말 꾸준히 연극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자체가 내 생명력이니까. 새로운 작품을 하는 건 새로운 창조에 대한 도전이지. 연기에서 똑같은 걸 반복하는 건 없어. 아무리 유사해 보여도 다 달라. 그렇게 새로운 걸 만드는 맛이 있다고.

-젊은 시절에 비해 배역이 한정적인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신가요.

=어쩔 수 없는 거지. 분장해서 젊은이를 연기할 수도 없는 거고. 주어진 역할에서 새로운 걸 만들면 돼. 지금은 아버지하고 할아버지 역이 전부지만, 그 안에서도 여러 가지 인물이 있으니 그 새로움을 찾아서 만들면 된단 말이지. 배우로서의 활용도도 줄 수밖에 없는데 자연스러운 거야. 지금 봐도 <거침없이 하이킥!> 같은 시추에이션 코미디는 걸작이야. 전무후무한 걸작. 전부터 드라마 PD들이나 드라마 국장들한테 그런 얘길 했어. 늙은이 시트콤을 해봐라. 예를 들어서 나, 신구, 최불암 혹은 박근형 같은 배우들 데리고 노인 시트콤을 해봐라. 그 안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 착수하는 사람이 없더라고. (웃음)

-연극, TV, 영화를 모두 경험한 원로배우로서 최근의 문화계 미투 운동은 어떻게 보시나요.

=두말할 것 없이 그런 행위 자체가 잘못인 거지. 본인 스스로 권력화가 된 거야. 내가 대연출가라는 의식의 권력화. 극단을 만들어 배우들을 집중 트레이닝하고 집단 관리를 하면서 절대 권력을 쥐게 된 거거든. 엄한 선생으로 남아서 좋은 후배를 길러내면 되는데 그러지 못한 거야. 세상이 많이 달라졌잖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봐야 된다 이거야. 종속적 관계가 돼선 안 돼. 어쨌든 내부의 문화를 정화하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야.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