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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박훈정 감독, "관객이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마음이었다"
장영엽 사진 백종헌 2018-07-05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박훈정 감독의 다섯 번째 연출작 <마녀>는 여러모로 그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기억될 영화다. 신인배우, 여성 캐릭터, 10대 소년·소녀와 우정, 그리고 초능력. 박훈정의 잿빛 누아르 세계에서 존재감을 찾아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키워드들이 이 영화의 DNA를 이루고 있다. “<마녀>는 전작들과 결이 다른 작품”이라 말하는 그는 전작 <브이아이피>(2017)의 부진을 딛고 보다 유연한 마음으로 관객과 마주하려 한다. 예상했던 모든 것들을 뒤엎어버릴, 미스터리한 초능력 소녀와 함께.

-<마녀>는 <신세계>(2012)의 후속으로 준비하던 작품이었다. 지금에서야 만들게 된 사연은.

=<신세계>를 마치고 두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중 하나가 <마녀>였다. 처음부터 여성 원톱 영화로 기획한 작품이었고, 주인공 캐릭터는 신인배우가 연기했으면 했는데 투자사들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큰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투자사들과의 이야기가 길어지는 와중에 <대호>(2015)를 만들게 되었고, <브이아이피>의 시나리오가 나왔다.

-몇년 전 구상했던 이야기를 지금 연출하는 과정에서 변화된 부분이 있다면.

=닥터 백(조민수)의 성별이 여자로 바뀌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언론 시사회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는 연출 의도를 밝혔다.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던 주제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인상 깊게 읽었는데, 이 책이 말하는 인간 본성의 특징에 공감한다. 소설에 따르면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 제도나 법이 없으면 인간은 모든 갈등을 폭력으로 풀려 한다는 거다. 또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초월한 존재에 매혹되는 동시에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를 증오하고 두려워한다. 어떻게 보면 <프랑켄슈타인>은 지금 주목받고 있는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영화나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철학적인 일본 SF애니메이션의 원전과도 같은 이야기다. 인간의 본성과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주제 의식을 한국적인 상황과 배경에 맞춰 풀어보고 싶었다.

-처음부터 이 작품을 여성 원톱 영화로 기획한 이유는.

=<마녀>의 부제는 ‘전복’이다. 예상했던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느낌의 인물을 만들고 싶었는데, 이러한 캐릭터의 특성에 여성이 더 적합하다고 봤다. 생각해보면 남자들은 뭔가를 깨고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여자보다 많은 것 같다. 물리적인 힘도 그렇고, 처한 환경도 그렇고.

-<마녀>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마녀’라는 단어 자체가 굉장히 모순적이다. 인간이 만든, 실재하지 않는 존재를 뜻하는 말인데, 인간들은 마녀를 자기들이 만들어놓고 한편으론 두려워하며 증오하고 없애려 하지 않나. 이런 모순적인 특성이 영화의 주인공 자윤(김다미)이 처한 상황과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신세계> <브이아이피> 등의 전작을 돌아보면 벼랑 끝에 몰린 인물들간의 암투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마녀>의 서사는 좀 다르다. 이건 모두를 초월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의 이야기다.

=얘기한 대로 전작에 등장했던 인물들에겐 힘의 한계가 있었다. 저 앞에 목적지가 보이는데 닿지 못하고 아등바등하는 느낌이랄까. 반면 이들과 자윤이 다른 점은, 자윤이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졌다는 거다. 처절함은 전작보다 덜하지만 쓰는 재미가 있는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황비홍과 좀 비슷한 인물이라고 할까. (웃음) 무협영화를 좋아하는데, <황비홍> 시리즈가 나왔을 때 기존의 무협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이 큰일을 당한다. 복수를 하기 위해 수련을 한다. 그런데 악당이 너무 강하다. 악당에게 한참 맞다가 각성해서 딱 이기는 게 일반적인 무협영화의 공식이라면, 황비홍은 그게 없다. 처음부터 가장 세다. 누구와 붙어도 이기는 인물을 볼 때의 쾌감이 <황비홍> 시리즈에는 있었다. <마녀>의 자윤도 그런 인물이었으면 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도 있잖나. 일련의 슈퍼히어로영화 서사에서 영웅의 고뇌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자윤에게는 이런 고뇌의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다 알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까.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윤은 어떤 목적이 생기면 그 힘을 주저하지 않고 쓸 인물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악으로 태어난 이 아이의 본성을 주변 환경이 변하게 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영화의 전반부에 자윤이 부모, 그리고 친구 명희와 맺는 관계를 비중 있게 다룬 건 그래서다.

-자윤을 연기할 배우를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알고 있다. 김다미를 캐스팅한 이유는.

=캐스팅을 할 때 주인공 인물과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의 배우를 원한다. 자윤의 경우 평범한 여고생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다양한 얼굴들이 보이길 원했다. 사랑스러운 면도 보이고, 유약해 보이기도 하며, 똑 부러지는 면도 있고, 영화 후반에 이르러서는 어떤 살기와 스산함까지 보여줄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런 얼굴을 가진 배우를 찾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막판까지 고심하다가 오디션을 통해 (김)다미를 알게 됐다. 첫인상이 참 묘했다. 많은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남성 캐릭터들의 이합집산을 다룬 영화를 주로 연출해왔는데,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를 연출하는 건 어떤 점이 다르던가.

=큰 차이를 느끼진 않았다. 다만 주인공인 자윤이 10대 여고생이다보니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그 나이 또래의 학생들이 실제로 어떤 말을 쓰는 지에 주목했던 것 같다. 여고생들이 친구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해서 아침마다 여고생들이 많이 모인 정류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지나가다 슬쩍 들었는데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웃음) 영화에서 자윤과 명희가 나누는 대화는 실제 또래의 여고생들이 쓰는 말을 엄청나게 순화한 버전이다.

-이번 영화에선 소녀들의 우정을 비중 있게 다룬다. 자윤의 친구 명희를 연기한 고민시 배우의 존재감이 인상적이더라.

=자윤처럼 비범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평범하게 살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아마 명희처럼 어린 시절부터 깊은 유대감을 맺었던 친구가 있지 않았을까 싶더라. 내성적인 성격의 자윤을 잘 챙겨주려면 그녀와 반대로 유쾌하고 활동적인 소녀였을 거라 생각했다. 여자주인공의 친구로 짓궂고 코믹한 이미지의 배우를 원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설정은 너무 작위적이었다. 정류장에서 관찰해보니(웃음) 함께 어울려다니는 여학생들은 대개 느낌이 비슷하더라. 그래서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자윤 역으로 오디션을 보러 온 고민시 배우에게 명희 역을 제안했다. 두 배우가 95년생 동갑이라 현장에서 친하게 잘 어울렸다.

-자윤을 뒤쫓는 능력자들은 왜 미국에서 왔나.

=그걸 얘기하면 속편의 스포일러가 될 거다. (웃음) 1970년대 미국에서 실제로 자행되었던 ‘울트라 프로젝트’와 관련 있는 인물들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마녀>의 흥행에 따라 속편의 제작 여부가 결정되겠지만, 지금 생각하는 2부의 부제는 ‘충돌’이다. 조직간의 충돌을 다뤄보고 싶다.

-귀공자 역에 최우식을 염두에 둔 이유도 궁금하다.

=최우식의 출연작 중 <거인>(2014)을 인상 깊게 봤다. 연기력이 굉장히 안정적인 배우라는 생각을 했고, ‘귀공자’ 캐릭터에 어울리는 스타일만 만들어주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본인은 ‘귀공자’라는 캐릭터의 별명을 듣고 “제가 이걸 할 수 있을까요”라며 걱정했지만, 외형적인 것은 만들어가면 되니까. 자윤에 대해 2인자로서의 콤플렉스와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귀공자 캐릭터의 심리에 좀더 주목해달라고 당부했다. 다만 옷발을 받으려면 어깨가 있어야 하기에 운동은 조금 하라고 했다. (웃음)

-자윤과 귀공자가 맞붙는 일대일 액션 신이 인상적이다. 남성 캐릭터와 대결해 파워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여성 캐릭터를 보는 쾌감이 있더라.

=처음에 스탭들이 묻더라. “할리우드영화를 보면 능력자들마다 개성과 기술이 다른데, <마녀>의 능력자들은 서로 어떻게 다르냐”라고. <마녀>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기술의 다름이 아니라 능력의 차이였다. 능력자들 가운데서도 자윤은 최고 클래스의 능력을 가졌고, 그러니 자윤이 여성이라고 해서 약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현실에 존재하는 남자와 여자의 물리적인 힘의 차이에서 벗어난 액션을 보여주고 싶었다.

-감독의 영화에서는 언제나 계급 문제가 중요한 것 같다. 이번 영화에서는 초능력이 일종의 계급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계급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국가엔 계급이 없다고 하지만 은연중에 계층과 계급은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나. ‘수평적 조직’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마녀>는 다양한 유형의 계급을 다룬다. 세대간의 격차, 조직에서의 위계, 조직 내 파벌간의 싸움. 계급을 구분짓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능력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과학자 ‘닥터 백’(조민수)의 존재가 흥미롭다. 조직 폭력배와 과학자로서의 특성을 함께 갖춘 인물인 듯하다.

=2부에서 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닥터 백이 왜 그런 특성을 가지게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닥터 백이 속한 집단이 조직 폭력배와 다른 점은 공권력의 보호를 받는다는 점이다. 구성원 하나하나가 굉장히 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인명을 경시하는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본다. 게다가 닥터 백은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니 자연스럽게 조직 폭력단의 보스 같은 특성을 보일 수밖에 없다. 처음엔 남성 캐릭터로 생각했는데 아무리 고민해봐도 마땅한 배우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자윤과 닥터 백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닮은 존재일 수 있겠다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룰 수 있는 아이를 만들어내는 인물을 생각해봤을 때 여자배우가 좀더 적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조민수 배우를 떠올렸다.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너무 설명적으로 알려주는 점은 아쉽다.

=그걸 시각적으로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 제작비가 문제였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제작비를 아껴 쓰자는 생각에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장면을 편집하다보니 대사가 길어진 것 같다. 속편에서 다 얘기해줄 건데 굳이 이 말을 넣어야 할까 싶다가도, 다음편이 못 나오면 무슨 소용인가 싶어 넣은 대사도 많다.

-<브이아이피> 개봉 이후 비교적 빠르게 <마녀>의 촬영을 시작했다. 영화를 둘러싼 ‘여혐 논란’으로 마음고생을 좀 했을 것 같다.

=<마녀>의 프리 프로덕션을 준비할 때 스탭들이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지더라. 그래서 현장에 가면 일부러 더 밝은 모습을 보여주곤 했지만 사람인지라 아무래도 신경이 안 쓰일 수는 없었다. 이게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는데, 작품을 할 때에는 다른 생각을 잘 안 하고 완전히 영화에 몰입하는 편이다. 그렇게 <마녀>를 찍으며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브이아이피>를 만들고 나서 변한 게 있다. 이전에는 감독으로서 관객이 내 작품의 의도를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런데 관객이 내 의도를 읽으러 극장에 오는 건 아니더라. 영화를 즐기러 오는 거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면서 그들이 나의 의도를 알아주기를 바란 건 잘못된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런 깨달음 뒤에 만든 영화가 <마녀>다. 관객이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만화 같은 실사영화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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