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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막 위의 유목민, <오버 더 레인보우>의 장진영
사진 정진환황선우 2002-04-24

몹시 다쳐 날개를 퍼덕이는 새 같았다. 담배를 끼운 손끝을 부들부들 떨던 <소름>에서의 그는 참혹하게 망가진 채로 오히려 더 강한 생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지독히 암울한 영화에서 그 어둠마저 먹어삼킬 독기를 품고 침침한 아파트 복도를 맴돌던 여자, 선영이었다. 우리는 그에게서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꼈고, 장진영이라는 배우를 비로소 발견했다.

미금아파트 510호로의 춥고 고독한 유배를 끝낼 때, 모든 관계자들이 그랬다. 여기서 어서 벗어나자고. 윤종찬 감독마저도 “다음에는 행복한 영화를 찍고 싶다”고 고개를 내저었다니 알 만하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스탭들 가운데에서 장진영의 발걸음은 생기넘치는 대학 캠퍼스로 향했다. 요즘 여기저기 얘기하고 다니는 것처럼, “따뜻하고 밝은 영화를 편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그의 나침반이었다. <오버 더 레인보우>는 그렇게 장진영에게 비타민 알약 같고 꿀물 같은 영화다. <소름>으로 인정받은 만큼 꽤나 에너지를 소모했을 그가, 스스로 내린 달콤한 처방전.

<오버 더 레인보우>는 교통사고로 부분적인 기억을 잃은 남자가 오래 마음에 품어온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 장진영은 여기서 ‘누구나 좋아하고, 누가 봐도 예쁜 여자’ 연희가 되었다. 대학 동창인 진수(이정재)가 해묵은 감정들을 되살리는 과정을 도와주는 현재와, 가라앉았던 기억들이 한 조각씩 떠오르며 드러나는 과거를 오간다.

“제가 좀 보이시하잖아요. 목소리도 저음이고. 처음엔 내가 지금껏 안 보였던 여성성을 꺼내면 되겠구나, 했는데 말투며 행동이며 목소리톤이며…. 몸에 잘 안 맞는 옷처럼 불편하더라고요. 그런데 제 눈에만 닭살스러웠나봐요. 이정재씨는 모니터보고 자기보다 더 남자같다는 거예요. 그때 뭐가 번쩍! 하하하….”

그러고보니 그가 지금껏 내밀었던 카드는 사랑스러움과 거리가 멀다. 무뚝뚝한 레슬링 프로모터였고(<반칙왕>), 아이를 잃은 엄마, 남편에게 맞는 아내였을 뿐(<소름>) 놀랍게도 그는 한번도 ‘예쁜 여주인공’이어본 적이 없다. 보통의 여배우라면 대부분 사랑이야기로 출발, 멜로드라마의 언저리를 한두번 거쳐가며 연기의 걸음걸이를 차근차근 익혀가게 마련일 텐데. 멜로가 처음이라니, 게다가 예쁘게 구는 자신이 어색해서 불편하다니. 그는 제법 독특한 수순으로 자신만의 보폭을 조절해나가고 있고, 그게 어쩌면 <자귀모> <반칙왕> <싸이렌>까지 꽤 여러 편의 작품을 찍어왔음에도 장진영이 신인처럼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상황을 이해하고 분석해서 자신을 조절하고 연기를 ‘내놓는’ 배우가 있다면, 장진영은 연기하는 인물 속으로 아예 풍덩 뛰어드는 타입의 배우일 것 같다. <소름>을 찍으면서 새벽마다 흉한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는, 그 한 가지 증거일지도 모른다. “연기는 연기고, 생활은 생활이다. 두 가지를 섞지 않는다”는 신하균의 말을 던져보았더니, 자신은 그러지 못한단다. 그에게는 분명히, 생활이 연기가 되고 영화가 생활을 지배한다.

“인물에 대한 생각을 꾸준히 갖고가야 무의식중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소름> 찍으면서는 밥 먹을 때도 선영이라면 어떻게 먹을까를 생각했죠. <오버 더 레인보우>를 하면서는, 나부터 맑아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좀더 따뜻하고 착하게, 연희가 바로 그런 인물이니까요.”

‘멜로의 주인공이 되어볼 것. 그러나 너무 뻔해지지는 말 것.’ 장진영이 스스로에게 내린 주문이다. 삶의 질곡을 겪으며 조용하고 우울해진 현재의 연희가 그런 멜로의 전형성에 갇힐 위험이 있다면, 나름대로 진지한데 그게 엉뚱한 20대 초반의 연희는 로맨틱코미디의 인물에 가깝다. 그리고 장진영은 과거 신을 찍을 때 훨씬 “업되었다. 신나서 통통 뛰어다녔다.”

촬영이 끝난 요즘 장진영을 ‘업’시키는 것은 뭘까. 온통 컬러풀한 물결인 봄옷들이 그 하나. 의상학이 전공인 그는, 자신의 취향인 에스닉 룩과 히피풍의 스타일이 올 봄 트렌드인 게 신나서 어쩔 줄 모르겠단다(과연 촬영을 위해 준비한 의상들도 그러했다). 그리고 “삶에 깊숙이 들어왔다”며 바쁘게 추천하고 다니는 김형경씨의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두권짜리임에도 손에서 놓지 않고 단번에 읽었다고 자랑한다). 아, 사람들 만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연희처럼 동아리 생활과 친구들에 둘러싸인 행복한 대학 시절은커녕, 한번 우울에 빠져들면 1주일이고 집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 ‘신경쇠약 직전의’ 20대 초반을 보냈다는 그는 사람들에게 관심없고 아무것에도 관심없던 성격이 연기를 시작하면서 오히려 사교적으로 바뀌었다.

“남들은 데뷔하고 나서 공개적인 자리에 나가는 거 불편해하고 사람들 눈에 띄는 거 싫어하고 그러던데. 이상하죠? 남들이 다 알고 사는 재미를 저는 요즘에야 깨닫는 거 같아요. 저 극장 같은 데도 잘 다녀요. 썩 많이 알아보지도 못하던데요, 뭐. 하하하.”

보랏빛 입술, 푸른 멍자국의 선영에게서 따스한 파스텔 톤으로 물든 연희까지. 장진영이라는 렌즈를 투과해 나오는 찬란한 빛의 스펙트럼은 점점 더 넓어질 것 같다. <오버 더 레인보우>를 찍으면서 행복했다는, 너무 행복한 게 조금 지루해져서 다시 강한 캐릭터로 돌아가고도 싶다는 그는 이제 무지개길로 가는 계단에 오른 걸까? 아니, 순차적인 상승의 스텝으로 그의 걸음을 설명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처음 만나는 자유를 만끽하는 집시처럼, 자신이 올라선 스타덤의 영토나 장르의 경계를 춤추듯 가로지르며 영토를 넓혀가는 유목민, 그게 장진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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