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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자게임2: 지록위마> 경순 감독 -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최성열 사진 김소미 2019-12-19

한국 사회의 비틀린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질문했던 <애국자게임>(2000) 이후 19년 만에 속편이 나왔다. <애국자게임2: 지록위마>는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과, 그 발단이 된 2013년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을 기억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집약한 다큐멘터리다. 2015년에 한국과 일본의 성노동자, 매춘부 출신의 위안부 피해자를 다루면서 여성주의 화두 안에서도 자주 소외되고 금기시되는 주제를 끄집어낸 바 있는 경순 감독이 이번엔 진영을 막론하고 우리 내부에 자리잡은 검열 본능과 분노, 피해의식을 꼬집는다. 경순 감독은 그 어떤 구호에도 쉽사리 안주하지 않는다. 헌정 사상 최초로 헌법재판소가 정당의 해산 판결을 내린 5년 전의 사건은, 그리하여 굵직한 사건과 이슈의 외피를 뚫고 수많은 개인의 체험까지 내밀히 당도한다.

-2013년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내가 이 주제로 영화를 만들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석기 내란음모사건, 통합진보당 해산에 대해선 사건 자체가 너무 허무맹랑하다는 인상 정도였다. 주변 지식인들이 오히려 내부를 더 비판하기에 황당하다는 생각도 했다. 사실 내게도 자주파, 주사파에 대한 편견이 있었고 정파적으로 여전히 나와 맞지 않는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일련의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한국에서 정파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더 깊이 생각하던 차에 아는 선배가 사건에 대해 쓴 책을 읽고 북콘서트를 다니면서 깜짝 놀랐다. 구속자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 그리고 당을 지지했던 많은 서민, 농민, 노동자의 상처를 알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가 이들에게 이렇게 무감할 수 있나 싶었다. 어느새 내 마음이, 발이 막 움직이고 있더라.

-정치적 의제로서의 관심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창작자로서 영화화를 결심하는 데에는 집단 내 개개인의 정서나 감정이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그렇다. 단지 이석기 의원 개인의 문제나 특정 정당의 문제로 이 사안을 바라보려 한 것이 아니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와 찬반을 떠나서 해산과 내부 검열 및 비판의 과정을 함께 겪어야 했던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에 대한 경험을 담고 싶었다.

-전작인 <레드마리아2>(2015)는 극장 상영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는데 차기작 작업에 심적 어려움도 따랐겠다.

=<레드마리아2>는 시작할 때부터 영화를 반대하거나 불편해할 사람들이 많으리라고 예상했다. 촬영 소식이 알려지면 SNS상에서 반발이 있거나 혹은 일부 단체가 촬영을 방해할까봐 일부러 일본 촬영을 먼저 진행했다. 결론적으로 작품을 위해서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진짜 어려웠던 점은 영화를 다 완성하고 나서 찾아왔다. 작품의 주제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지 배급사쪽에서 갖는 두려움과 걱정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실감해야만 했다. 독립영화 배급사 사정이 워낙 힘든 것을 알고 있기에 그냥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편을 택했다. 사실 <레드마리아2>와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한국 사회에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다름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운동권, 진보 진영, 예술계가 오히려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그저 그런 현상 자체를 영화로 짚으려 하는 건데, 내 문제제기 자체를 마냥 불편해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나는 무슨 사상을 주장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보자는 것 뿐이다. 싸움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기록에 충실하려는 의지다.

-한국 사회의 레드콤플렉스를 건드리는 주제이긴 하지만 <애국자게임> 이후 거의 20년이 지난 상황에서 왜 굳이 속편의 제목을 택했나.

=이번 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게 최하동하 감독과 함께한 <애국자게임>이었다. <민들레>(1999)와 거의 동시에 찍었기 때문에 내게는 <애국자게임>도 첫 영화나 마찬가지다. 나의 방향성과 색채를 잡아준 영화다. 당시가 외환위기 시절이었다. 6·10 민주항쟁 이후 20년, 민주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하고 세부적인 의제들이 법으로 제정되고 가시화될 무렵에 경제위기가 닥친 것이다. 대규모 구조조정과 함께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폭발했던 지점에서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왜곡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이후 민주정부가 들어서기는 했지만, 6월항쟁에서 추구했던 민주주의 제도의 정착화, 일상화는 단절됐다. 나는 이걸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라고 표현하는데, 통합진보당이 해산될 무렵 다시 한번 그 과거가 떠올랐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차라리 <애국자게임> 시절에는 보수와 진보가 뚜렷하게 구분되고, 지식인들이 최소한의 연대를 이루는 어떤 힘이 있었다. 적어도 내부적인 사상 검열, 검증의 강박은 보기 힘든 때였다. 반면 지금은 우리 내부가 많이 분열되고 망가졌다고 느낀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밥그릇 앞에서 약해지는 것처럼, 진보 진영이 존립의 위기를 느끼자 그들 내부에서 종북 이야기를 꺼내고 편가르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을 짚어보고 싶은 마음이 20년이 지나 두 번째 시리즈를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다.

-언론인, 변호사, 활동가, 전 통합진보당원, 당원들의 가족 등 그룹별 인터뷰로 영화를 꾸몄다.

=처음엔 사전 취재 목적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취재 용도지만 기록도 약간 남겨놓자고 마음먹었던 촬영분을 영화에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여러 사람이 모이니 그제야 허심탄회한 말이 나오는 풍경을 확인하게 되어서였다.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의 시발점으로 지목된 강연이 있다. 촬영 초창기에 그날 강연에 참여했던 통합진보당 의원 7~8명 정도를 모아 이야기를 나눈 적 있는데, 그분들 모두 그동안 오해받을까봐 자신들의 기억이나 상처를 꺼내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안위나 미래를 걱정해 개인으로서는 말하지 못하는 것이 많을 거라 생각했고, 서로 말이 잘 통할 수 있는 집단으로 묶어서 그룹 인터뷰를 하면 실마리가 풀릴 거라고 봤다.

-촬영을 시작해 후반작업을 마무리하기까지 긴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정권이 바뀌고 남북 정세가 급격히 변화하는 등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롤러코스터를 탔을 법하다.

=정말 그렇다. (웃음) 처음엔 사건이 터졌던 약 일주일간의 일을 재구성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 여러 입장을 들어볼수록 진영의 갈등, 남북 관계, 국정원의 개입, 비례 경선 문제 등 많은 사안들이 얽혀 있어서 난감했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이러다 영화 망친다고 걱정할 정도였다. 지난해 겨울에 한창 촬영본을 붙잡고 씨름할 때, 혼자 일주일에 한번은 겨울산에 올랐다. 그러면서 내가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사건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처음 작품 제작을 결심했을 때처럼 저마다의 이야기를 듣는 거였다. 그러려면 사건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가는 게 맞다고 확신하게 됐다.

-텀블벅 펀딩을 통해 ‘배티’(배급 후원과 티켓 구입의 줄임말) 개봉이라는 관객 주도형의 새로운 개봉 방식을 시도했다.

=어떻게 하면 독립영화가 보다 의미 있는 상영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의 결과물로 봐주길 바란다. 그리고 영화에 맞는 심층 기획 토크를 함께 제공할 예정이다. 총 4회에 걸쳐 각기 다른 인사를 초청해 토크를 연다. 마지막엔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가 참석해 ‘혐오와 사상의 자유, 어떻게 존립 가능한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영화가 소개되는 창구 자체가 천편일률적인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번 배티 개봉이 선례로 남았으면 한다.

-앞으로 새로이 착수하게 될 주제는 어떤 건가.

=언제나 만주에 대한 동경이 있다. 단절되고 잊힌 역사로서의 만주를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 2005년에 처음 방문했다가 그 이후로 내내 숙원 사업처럼 다큐멘터리 작업을 꿈꿨으나 아직 실현하지 못했다. 지금의 체력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아서 앞으로 1년 정도는 천천히 생각을 다듬고 건강을 가꾸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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