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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언덕' 박석영 감독, “나의 영화들은 나의 두려움에 대한 고백”
조현나 사진 백종헌 2020-04-23

<들꽃> <스틸 플라워> <재꽃> 등 ‘꽃 3부작’을 연출한 박석영 감독이 신작 <바람의 언덕>으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 자식을 버리고 떠난 엄마 영분(정은경)이 고향으로 돌아와 딸 한희(장선)와 재회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전작 <재꽃>의 이야기가 인물들이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면, <바람의 언덕> 속 인물들은 서로를 마주하며 함께 나아가고자 한다. 박석영 감독은 “그간 잘 촬영하지 않던 대화 신을 영화에 넣었고, 해당 신을 무척 고심해 촬영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실제로 인물들은 그간 쌓인 말들을 온 힘을 다해 쏟아내며 대적하지만 어디로도 도망치지 않으며 관계 회복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바람의 언덕>이 더 밝게 느껴지는 이유다. “<바람의 언덕>을 찍으며 한 발짝 나아간 것 같다”고 말하는 박석영 감독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았다.

-<재꽃> 이후 3년 만의 신작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오랫동안 한 사람의 이야기를 가지고 찍었으니 개운하게 다음 영화를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새로운 영화를 시작하기 어렵더라. 다음 작품을 어떻게 할지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무 연고도 없는 태백으로 무작정 여행을 갔고 그곳에서 <바람의 언덕>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태백의 골목길을 보며 그곳에 전단지를 붙이는 이를 상상했고 실제로 관객에게 내 영화를 직접 홍보해주는 어머니, 그리고 한희의 학원 홍보 전단지를 붙이는 영분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작기 형식의 영화 인스타그램을 운영하고 또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란 이름으로 순회 상영 및 GV(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있다. 어떤 계기로 이러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나.

=홍보 비용이 부족한 독립영화로서 최대한 많은 관객에게 영화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영화관에 영화가 걸려도 1~2주 만에 사라지니까, 일반 개봉 전에 전국 영화관을 돌면서 먼저 관객을 만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몇 시간씩 관객과 GV를 하고 같이 맥주를 한잔하기도 했다. 좀더 깊이 관객을 만났다는 기쁨이 있다.

-어떻게 정은경·장선 배우를 캐스팅했나.

=정은경 배우는 <재꽃>에서 아깝게 사용하지 못한 장면이 많았다. 그만큼 워낙 훌륭한 배우라 꼭 같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또 정은경 배우가 엄마라는 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삶을 찾아나서는 영분을 연기하기에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희를 연기한 장선 배우는 그가 가진 좋은 면들을 영화에서 확장해보고 싶었다. 촬영 중에도 배우에게서 배어나오는 여러 지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영분, 한희, 용진(김태희) 등 등장인물들 모두 각자의 외로움을 지녔다. 이러한 연출에 담긴 의도가 궁금하다.

=본래 내 작품에 사람들이 대화를 하는 시퀀스가 별로 없다. 인물들이 자기 마음을 잘 터놓지도 않고. 내가 기본적으로 언어적 화해를 믿지 못하는 것과 인물들의 외로움이 이어지는 듯하다. 한희는 엄마의 부재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진심을 토로하는 순간 앞에 있는 사람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영분과 한희는 바람의 언덕에 올라 서로 대면하고 대화한다. 돌이켜보면 각자 자신의 두려움을 고백하는 마지막 시퀀스인 것 같다. 서로 말하지 못한 진심을 비로소 드러내는 것이다. 그동안 네편의 작품을 제작하며 마주한 것은, 결국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영화들은 나의 두려움에 대한 고백일 수도, 또 인물들의 고백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 인물들은 항상 떠돌아다니고 서로를 빨리 마주하지 못하나보다.

-한희가 떠나는 엄마를 붙잡는 신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다. 해당 신을 연출하기 위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인 것이 있나.

=로케이션을 돌아다니다 물밑이 다 드러난 다리를 봤다. 마치 마음속에 숨겨놓았던 것들이 다 드러나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 다리 위에서 두 인물의 감정들이 오고 가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때의 영분은 평생 쌓아왔던 말들을 모조리 뱉어내는 것 같았다. 사실 영분의 말들이 마냥 못된 말들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간 영분도 계속 누군가에게 매여 산 사람이니까. 그렇게 다 털어냈으니 더이상 도망가지 않고 한희 옆에 있을 수 있는 거다. 한희도 같은 상황이었다고 본다. “엄마 그때 나보다 더 어렸잖아, 이해해, 나는 잘 자란 어른이 되었어.” 여기서 어떤 말을 더 하겠나. 둘 다 너무 미안했다고, 또 서로를 너무 좋아한다고 열심히 이야기하는 신이다. 둘의 관계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을 다 끌어내려 애썼다,

-가족, 그중에서도 여성들의 서사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다. 두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파생시키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일단 내가 남성 주도적인 시스템이나 집단을 불편해한다. 반대로 내가 긍정하는 인물들은 어머니와 할머니다. 그런 어머니를 곁에서 오랜 시간 봐왔고. 말하자면 내가 납득할 만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바로 엄마이자 여성이다.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을 그리는 게 영화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성 서사를 그리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이후에는 정하담 배우나 장해금 배우 등 함께 작업한 배우들이 성장해나가는 것을 보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전작들에 비해 영화가 밝고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한희는 안쓰러울 정도로 스스로 밝게 있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가족 없이 사회적 관계만 맺고 살았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반면 영분은 에너지가 넘치는데, 다리 위에서 쏟아낸 말들을 보면 그 마음속은 그리 여유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어떤 이유에서든 영화 속 인물들이 자기 삶을 버티기 위해 밝고 따뜻한 것으로 스스로를 감쌌기 때문에 영화를 희망적으로 느낄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더 밝아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함께 나아가기 위한 여정의 첫 발걸음을 뗀 것이라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배우들의 온기가 영화에 배어나오기도 했을 테고.

-<바람의 언덕>이라는 제목이 바람(wind)과 바람(wish) 등 중의적으로 읽힌다. 의도한 것인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원래 거제도에 있는 바람의 언덕이 유명해서 제목을 바꾸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서 그렇지 태백 역시 바람의 언덕이다. 지금 와서 보면 한희가 영분의 바람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한다. 버린 딸을 마주하게 되면, 이렇게 건강하고 환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았을까. 어쩌면 한희는 그런 영분의 바람이 전부 모여 형성된 사람 같다. 나아가 내가 정선 배우와 같은 환하고 선한 사람을 캐스팅한 것도, 인간이 어떻게든 화해하고 서로의 것을 나눌 수 있는 존재라고 믿고 싶은 나의 바람이 담겨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원래는 바람(wind)의 의미였지만, 지금은 바람(wish)인 것 같다. 영화 포스터도 겨울이 지나 모녀가 함께 다시 놀러간 모습처럼 보인다. 그랬으면 하는 영화의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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