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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GV 빌런 고태경> 출간한 정대건 감독, "때로는 오케이가 없어도 가야 한다"
김소미 사진 백종헌 2020-05-14

다큐멘터리 <투 올드 힙합 키드>(2012), 극영화 <메이트>(2019)를 만들었던 정대건 감독이 2020한경신춘문예로 소설가 데뷔를 알렸다. 지난 4월 20일 출간된 그의 첫 장편소설 <GV 빌런 고태경>은 제목만으로도 영화와 극장을 애호하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소설에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낳은 데뷔작 이후 막막한 미래 때문에 신음하는 30대 초반의 영화감독 조혜나, 택시 기사로 일하는 50대의 GV(관객과의 대화) 빌런 고태경이 나온다. GV 전장에서 감독 대 빌런으로 조우한 이들은 곧 감독 데뷔를 준비하는 고태경의 일상을 다큐멘터리로 만들며 동료애를 쌓는다. “노 굿(NG)을 오케이하며 살아온 인생. 변명 같은 인생. 관객은 그런 사정에 관심이 없다”던 조혜나의 짓무른 패배감은 총 20개의 장(張)을 거치면서 어느새 한층 의연해진 푸릇함을 되찾는다. 정대건 감독은 소설 속 작가의 말에서 “모든 준비생과 지망생들, 기회만 주어진다면 잘해낼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그리고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소설을 썼다고 고백한다.

-“우선 영화 잘 봤습니다”라는 GV 단골 코멘트가 절묘하게 등장한다. 진상 혹은 민폐로 쉽게 축약되는 대상의 이면에서 오래 간직한 꿈과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건져 올렸다.

=나 역시 각종 특별전이나 영화제를 드나들었기에 GV의 생태계를 잘 아는 편이다. “우선 영화 잘 봤습니다. 그런데…”로 포문을 열어 자기를 뽐내는 감상만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다소 난감한 질문을 하는 관객이 종종 있다. 몇해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를 유머로 소화해 굿즈(배지)로도 내놓지 않았나. 예전엔 ‘좀 별나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그들에 대해 더 궁금해지더라. 일부는 영화를 정말 사랑하고 영화에 놀랍도록 해박한 사람들도 있었다. ‘극장 밖에서는 어떤 모습일까, 자기 자신이 나오는 영화를 본다면 그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싶었다.

-2019년에 소설을 썼다. 조혜나와 고태경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아녜스 바르다의 <방랑자>를 보고 나오는 장면에선 지난해에 실제로 열린 바르다 특별전이 떠올랐는데.

=나 역시 그때 바르다 영화들을 봤다. (웃음) 지난해 소설에 구체적으로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내 경험의 일부를 실시간으로 반영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나의 취향도 많이 녹여냈다. 근처의 팥죽집이라든지, 을지다방이라든지… 쓰는 작업 자체가 즐거웠다.

-청년세대의 쓸쓸한 연애담을 그린 첫 장편 극영화 <메이트>가 2019년 1월 개봉했다. 직후 소설 쓰기에 돌입한 건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나왔는데 학교 동기들 몇명과 리프레시를 할 겸 창비가 운영하는 창비학당에서 소설 쓰기 강좌를 들었다. 창비학당에서 워낙 이런저런 걸 많이 가르쳐줘서 우리끼린 ‘망예종’(망원동+한예종)이라 부른다. (웃음) 그때 마감이 주어지니 나 역시 뭐라도 쓰게 되었고, 지금 소설의 4장에 해당하는, 여의도에서 현장 제작 지원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을 일기처럼 썼다. 지난해 봄엔 영화 개봉 일정을 마무리한 뒤 딱히 소속도 없는 상태여서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질 위기 같은 게 찾아왔다. 몰두할 게 필요했다. 소설 쓰기는 혼자 자율적으로 할 수 있으니 그런 점에서 유용한 활동이다.

-영화학교 출신에 장편영화를 발표한 30대 초반의 영화감독으로서 혜나는 작가의 자기반영적 성격이 강한 캐릭터다. 결정적으로 성별을 다르게 설정한 이유는.

=나의 경험, 감정, 그리고 상처까지 솔직하게 쓰기 위해 나 자신에게도 ‘이것은 픽션이다’라고 믿음을 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연애·사랑 이야기가 공명하는데 그런 점에 있어서도 감정의 결을 조금 더 섬세히 표현해주는 목소리라고 느꼈다. 오히려 혜나의 친구인 승호 역에 얼마간 나를 대입한 편이다.(비영화과 출신으로 영화학교 입학 후 친구들 사이에서 묘하게 겉돌았던 승호는 다큐멘터리 제작 경험이 있어 혜나의 작업에 도움을 주는 인물이다. 정대건 감독 역시 철학을 전공하고 첫 작품으로 다큐멘터리를 작업했다.-편집자)

-후반부에서 조연들의 역할을 살뜰히 거두어들이고 완결성 있는 마무리감을 주는 방식이 시나리오 훈련을 거친 작가가 발휘할 수 있는 솜씨 같았다. 잘게 쪼갠 20개의 챕터 또한 리드미컬하게 이루어져서 영화적인 장면 전환으로 다가왔다.

=끊어주는 포인트랄까, 전환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썼다. 작법서 마니아인데(웃음) 소설을 쓰고 공부하면서 소설에도 연출, 장면화 같은 용어가 쓰이는 것을 알았다.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보는 게 재미있더라. 그중 소설만의 뛰어난 기쁨이라고 한다면 예산과 상관없이 쓸 수 있다는 것? 소설에서 영화제 참석차 바르샤바도 가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촬영장을 묘사하며 여의도도 붕괴시킬 수 있으니 얼마나 재밌나.

-<투 올드 힙합 키드>와 <GV 빌런 고태경>의 유사성이 흥미로웠다. 각각 첫 영화, 첫 소설인 셈인데 좋아하는 분야에 뛰어들긴 했지만 일단 주인공이 되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명민한 관찰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태도가 보인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반대로 친화력이 부족한 편이라 더 쉽게 관찰자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어느 집단에서든 나는‘코어’가 아니다. 어떤 집단과 일상을 같이 보내면서도 내가 그들의 일원이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겉도는 시간을 가진다. 랩을 하던 힙합 모임에서도 영화학교에서도 그랬다. 나는 어쩌면 ‘다큐멘터리적인 사람’이 아닐까? 카메라를 들고 주변 사람들을 찍는 데 잘 맞는 기질이 있는 것 같고 소설을 쓸 때도 그런 면이 튀어나왔다.

-조혜나의 인생 영화이자 고태경이 조감독을 했던 (가상의) 영화로 <초록 사과>가 언급된다. 여러 인물의 인연을 신기하게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체인데 현실의 정대건 감독에게 <초록 사과> 같은 작품이 있다면.

=작중에선 오래된 고전 멜로영화라는 컨셉이지만 실은 문소리 배우가 주연한 <사과>(2005)를 생각하다가 제목을 지었다. 내가 꼽는 한국영화 톱10에 언제나 들어가는, 정말 좋아하는 영화다. 요즘 나왔다면 더 열렬한 반응을 얻었으리라 생각한다. 여성주인공의 주체성이라든가 사실적인 묘사가 압권이다.

-삶은 불완전하며 그러므로 노 굿(NG)의 지속이 당연함을, 인생의 선택은 결정적인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임을 받아들이는 조혜나의 성장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19장, 20장 즈음을 쓸 때는 주제가 저절로 쌓여가는 굉장한 희열을 느꼈다. 늘 맨 뒷자리에 앉아 영화에 대한 감상을 메모하는 고태경처럼, 나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서울아트시네마나 영상자료원의 뒷자리에 앉아 어둠 속에서 아이디어를 끄적였다. 그 순간에 나 자신의 존재가 재미있다고 느꼈다. 혜나처럼 현실의 나도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장편영화를 찍으면서 많이 좌절했는데, 이 소설을 쓰면서 치유도 받고 스스로 스토리텔러라는 미세한 자각도 가지게 됐다.

-앞으로 소설과 영화를 어떻게 병행할 계획인가.

=당선과 출간에 기뻐한 것도 잠시, 생각보다 이 책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우스갯소리로 영화진흥위원회, 영화학과 필독서라고 말한다. 창작자에게 왜 지원이 절실한지 이토록 생활 밀착형으로 잘 다루는 이야기는 드물 거다. (웃음) 모든 작품이 작가의 반영이겠지만, 다음엔 가급적 나 자신과 더 거리를 둔 이야기를 쓰고 싶다. 보다 비일상적인 사건과 플롯을 다룬, 선 굵은 장편소설을 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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