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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트리스] '애비규환' 정수정 - 꾸밈없이, 마음 가는 대로
김소미 사진 오계옥 2020-11-12

“연기하며 나도 깜짝깜짝 놀랐다.” <애비규환>의 토일(정수정)은 그런 캐릭터였다. 임신 5개월차에 폭탄선언하듯 아직 고등학생인 연인과 결혼을 발표하고, 쪽지 한장 없이 덜렁 짐을 싸서 아빠를 찾겠다며 고향 대구로 떠나버린다. 무턱대고 과감한 사람인가 싶다가도, 들여다보면 속 깊고 상냥해서 매력을 하나로 정의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 배우 정수정과 토일의 만남은 어쩐지 합이 좋다.

걸그룹 에프엑스(f(x))에서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영어면 영어, 거기다 돋보이는 이미지까지 더해져 부족함 없는 일명 ‘사기캐’였던 정수정은,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기점으로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한층 더 궁금하게 만들며 진화의 재능까지 증명했다. 그의 첫 스크린 주연작인 <애비규환>은 그간 주어진 모든 시선과 컨셉을 벗어던진 채 맨 얼굴을 드러낸 영화다. 데뷔 시기로 보면 어느덧 10년차 배우지만,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묵밥을 퍼먹는 정수정은 마치 처음 보는 신인처럼 생경하고 반갑다. 올해 10월 방영이 시작된 드라마 <써치>에서 유능한 군인을, <애비규환>에서 자기 뿌리 찾기에 나선 솔직한 대학생을 연기한 정수정은 요즘 들어 분명 미래가 가장 기대되는 젊은 배우 중 하나다.

-작업 후 최하나 감독과 무척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고. 어떻게 가까워졌나.

=일단 나이가 비슷하고. 처음 미팅했을 때부터… 왜 아싸(아웃사이더)들은 서로 알아보잖나? 그런 느낌이었다. (웃음) 딱 보자마자 서로의 성향을 단번에 알아보고 가까워졌다. 좋아하는 음악도 비슷하다. 출근길에 메시지로 노래 하나 툭 보내면서 “오늘 하루 열심히 합시다!” 하며 서로 다독이고 그랬다.

-<애비규환>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잠깐 과거로 돌아가보자. 2009년에 걸그룹 에프엑스에서 크리스탈이란 이름으로 데뷔 후 이듬해에 시트콤 <볼수록 애교만점>에서 정수정이란 이름을 썼다.

=크리스탈도 정수정도 둘 다 나라서 이름의 의미는 개인적으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처음에 정수정이란 이름을 쓰고 싶다고 제안한 건 제작사측 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배우들과 나열할 때 그게 더 보기 좋아서 그런 걸까? 나야 정수정이 내 본명이니 그것대로 좋았다. 크리스탈은 확실히 어감이 약간 이국적이고 화려한 느낌이 있긴 하다. 평소에도 모두가 나를 수정이라 부르지, 아무도 ‘크리스탈~’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요즘은 아이돌에서 배우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은데, 가수와 배우 커리어를 거의 동시에 시작한 경우다.

=가수 연습생 시절에 연기 트레이닝도 함께 받았다. 회사도 고민을 했었는지 데뷔 전에 ‘너 가수 할래, 배우 할래?’ 물어보기도 했다. 어쩌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룹으로 데뷔를 하게 됐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연기도 시작했다. 그때 난 정말 어렸다. 다행히 막상 연기를 해보니 재미가 있었고, 내가 잘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 그런 경험들이 차츰차츰 쌓여서 언젠가부터 더 열심히 연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 같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다혈질 한의대생, <플레이어>의 화끈한 드라이버, 현재 방영 중인 <써치>에서 연기하는 비무장지대의 군인까지. 드라마 작업을 꾸준히 하면서 배우로서 존재감과 호감도를 쌓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배우 커리어를 확장하고 싶다는 생각엔 언제부터 불이 붙었나.

=시작은 빨랐지만 연기에 대한 욕심은 활동하면서 뒤늦게 생긴 편이다. 사실 얼마 안됐다. 연기가 재밌다고 처음 느낀 게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아닌가 싶다. 좋은 작가, 선배님들을 만나서 보는 눈이 달라졌고, 이후부터 확실히 진지하게 더 다양한 역할을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한국영화 스크린에서 첫 주연작으로 이름을 올린 <애비규환>은 아이돌 크리스탈이 가졌던 세련되고 도시적인 이미지와는 정반대를 향한다. 어쩌면 이런 이미지의 간극이 본인에게 쾌감을 주지 않았을까 싶더라. 해방감 같은 걸 느끼지는 않았나.

=확실히 그랬다. 항상 화려한 이미지로 보이는 면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있는데, 내추럴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고. 무엇을 어떻게 보여줘야 나를 편안하게 볼까, 그런 고민도 했다. 단적으로 말해서 <애비규환> 촬영할 땐 일단 외양적으로도 신경을 안 썼다. 머리를 질끈 묶고 옷도 완전 후줄근한 데다 화장은 당연히 안 했다. <애비규환>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나를 확실히 보여주었다는 만족감이 있다.

-오프닝부터 토일 캐릭터가 확실해서 마음이 갔다. 토일은 한시에 담긴 애수를 사랑이 아닌 임금에 대한 충성심으로 보는 유교적 해석에 짜증을 내고, 자신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고등학생 호훈(신재휘)에게 먼저 돌진해 키스한다.

=아마도 여자라면 누구나 토일의 그런 욕망에 공감하지 않을까. 내가 해보고 싶었던, 하지만 현실에서 마냥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들을 토일은 척척 해낸다. 한번쯤은 무언가 저질러보고 싶은 욕망을 토일이 건드리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냥 제멋대로에 남의 말도 잘 안 듣는 사람 같지만, 그 나이대에 품을 수 있는 사랑스러움으로 보여서 그것 마저 매력적이었다.

-에프엑스의 크리스탈 역시 그 나이대 아이돌에게 요구되는 상냥함이나 애교의 정석과는 거리가 있었다. 토일처럼 말도 시원스럽게 하고. 아이돌 생활에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것 같다.

=애교야 일종의 한국 문화니까…. 다행히 누군가가 내게 억지로 시키지는 않았는데, 만약 시켰다면 못했을 것 같긴 하다. 직업적으로 묵묵히 하고 계신 분들을 리스펙트하고 어려움도 잘 안다. 사실 옛날엔 ‘나는 왜 이런 게 잘 안될까?’란 생각을 많이 했다. 기본적으로 가짜 같은 게 싫은 건 있다. 인터뷰도 최대한 나답게 하려고 한다. 그게 성격이니까, 아무래도 밖으로도 보여지는 것 같다. 그렇다고 마냥 시원한 성격은 아닌 게… 되게… 소심할땐 소심하다. (웃음)

-토일은 완전히 힘을 빼고 연기해야 하는 캐릭터였다. 연기 톤을 잡기 다소 어려운 경우가 아닐까 싶은데.

=처음에 톤을 좀 못 잡거나 할 때 감독님이 모든 대사 앞에 ‘나 오늘 돈가스 먹었어’를 말하라고 시켰다. 너무 감정을 실으려 하지 말고 그냥 나 오늘 점심 메뉴로 뭐 먹었어, 하는 느낌으로 “나 임신했어”를 하라는 거지. 왜 돈가스인지는 나도 아직 모른다. 감독님이 좋아하는 메뉴가 아닐까 싶긴 한데. 현장에서 갑자기 감정이 안 나오면 감독님이 내게 다가와서 “수정씨! 돈가스!” 했다. 그러면 난 또 “네네!” 하고.

-토일이 거의 매 신 등장하다시피 한다. 리딩 롤로 완전히 이끌어가는 역할이라 참여도 면에서도 새로운 경험이었을 듯하다.

=매 작품 부딪치면서 한번쯤은 꼭 크게 좌절하는 순간이 있는데 이번 영화는 나도 첫 주연 영화, 감독님도 데뷔작이어서 처음엔 더 긴장했다. 우리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잘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현장에 가야 문제가 없을 거란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게 자주 만나기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 않나. 그래서 가끔 어려운 순간이 올 때마다 서로 하루씩 번갈아가며 울었다. 그렇게 울고나면 다음날 회복되더라. 연기 연습은 주로 토일에 빙의해서 시나리오에 없는 대사들을 감독님에게 즉흥연기처럼 던지는 식으로 했다.

-후반부 클라이맥스 신에서는 거의 연극 무대처럼 모든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여러 사람들 앞에 홀로 서서 굉장히 혼란스러운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신이라 연습하면서부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다.

=휴, 그래도 어떻게 해내긴 해냈네…. (일동 웃음) 그 신만 이틀 동안 찍었다. 어려운 신인 걸 선배들도 아니까 잘하고 있다고 더 북돋워주셨다. 클로즈업을 찍을 땐 신경 쓰일까봐 일부러 저 멀리 도망가 있기도 하고, 여러모로 정말 감사한 현장이었다. 그리고 선배님들이 많으니 긴장한 건 사실인데, 어떻게 보면 또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았달까? 내가 잘해야 한다는 마음도 컸지만 그렇다고 주눅 들진 않았다. 어딜 가도 그렇게 마인드 컨트롤하려고 노력한다.

-그룹 생활을 해서 조화에는 익숙하지만 남의 리듬에 잘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있었다.

=인정. (웃음)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 모두가…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고 표현했으면.

-일 외적으로도 독립적이라고 느끼나.

=우리 집 여자들이 다 그런 것 같다. 엄마가 굉장히 도시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이랄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랐고, 영향을 받았다. 당연히, 엄마니까. 그런 면을 닮을 수 있어 너무 좋다.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생활을 잘 챙기다보면 일도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같다.

-코미디 장르에 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배우 전지현이 능청스런 코미디를 탁월하게 소화할 때 이미지와 연기력 사이의 괴리감이 더 재미를 주는 것처럼, 정수정에게서도 그런 요소를 찾고 싶어 하는 연출자가 많을 것 같다.

=나도 코미디 좋아한다.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도 그래서 즐겁게 했고. 슬랩스틱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은은하게 웃기고 싶다는 생각은 한다. <애비규환> 후에 찍은 영화 <새콤달콤>(가제, 감독 이계벽)도 코미디적 기운이 충만하다. 평소에도 친한 사람들 앞에선 나름대로 이런저런 유머를 구사하는 편이다. 앞으로도 작품 제안을 많이 받았으면 싶다.

-데뷔 무렵에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대중에게 늙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고 20대 후반이면 은퇴할 거라 했다. 그런데 27살인 올해 첫 스크린 주연작을 내놨다. 배우는 어쩌면 잘 늙는 모습을 보여주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꽤 재밌는 결과다.

=하하. 그때는 너무 어렸으니까 20대가 멀게만 느껴졌다. 그 말을 처음 했을 때가 벌써 10년은 넘었을 텐데, 내가 연기를 이렇게 좋아하게 될지 몰랐다. 지금 나이면 결혼하고 애가 둘 정도는 있을 줄 알았고. 근데 이게 뭐야. 막상 20대 후반이 되었는데 내가 보기에 난 아직도 마음이 10대 상태인 것 같다. 그리고 ‘은퇴’라는 단어가 조금 세게 느껴질 순 있지만, 사실 지금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어느 정도 오래 일하고 나면 언제든 직업적인 영역에서 물러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전 평생 연기할 거예요’라는 말은 못한다.

-아이돌로 최정상에 올랐고, 새 소속사에서 배우 활동도 성공적으로 꾸려가고 있다. <애비규환>에서 대구를 여행하는 토일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실제 배우 정수정은 활동하면서 해외는 다녀봤어도 국내 여행은 해볼 기회가 없었겠구나, 싶었다. 그나마 요즘은 여유가 있는 편인가.

=(망설임 없이) 요즘 행복하다. 얼마 전에 생일이었는데, ‘아, 나 되게 행복하네’라고 되뇌었다. 일상에서 소소한 걸 놓치고 산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릴 때부터 굉장히 많이 노력해왔다. 이를테면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는다거나 하는. 특히 얼마 전부터 나만의 리듬을 깨달아가면서 마음이 많이 안정됐다.

-보통은 나이 들어서 그런 종류의 행복을 찾지 않나? 어릴 때부터 골몰했다니 좀 의외의 대답이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 활동이 너무 힘들어서 내 일상이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데뷔해서 스무살 때까진 내가 어떻게 활동했는지 머릿속에 각인된 게 없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기에 나만의 삶, 여유 같은 걸 찾고 싶었다. 행복이란 게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개인 SNS 계정에서 <애비규환> 촬영장 사진을 유독 다정하게 기록해두었더라. 동료 배우들을 엄마, 아빠 등으로 부르면서. 감독님과 엠버(에프엑스 멤버)가 함께 찍은 사진도 있던데.

=엠버가 촬영장에 놀러 왔었다! 하필 그날 키스 신찍는 날이었는데 왔더라고. 내가 빨리 가라고, 계속 그랬다. (웃음) 감독님이 워낙 에프엑스를 좋아해주셔서 그것도 좋았다.

-이미 다국적 팬들이 많은 것도 그렇고, 영어를 잘해서 앞으로 해외 진출의 가능성도 궁금한 배우다. OTT 플랫폼 등을 통해 해외 프로젝트 제안이 온다면 해볼 생각이 있나.

=요즘 같은 때 해외 프로젝트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완전 하고 싶다. 나 역시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이계벽 감독의 <새콤달콤>도 기대된다. 로맨스 장르여서 <애비규환>보다 좀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 줄 것 같은데.

=음… 왠지 <애비규환>만큼이나 좀 놀라게 해드릴 것 같다. 지금까지 보여드리지 않은, 확실히 새로운 모습이다. 일단은 여기까지! (웃음)

영화 2020 <애비규환> 2015 <여자, 남자>

드라마 2020 <써치> 2018 <플레이어> 2017 <슬기로운 감빵생활> 2017 <하백의 신부> 2014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2013 <상속자들> 2011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2010 <볼수록 애교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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