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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조제' 남주혁 - 옆에 있을게요
이주현 사진 오계옥 2020-12-03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귀하고 특별한 보호막을 두르고 있던 <보건교사 안은영>의 홍인표 한문 선생님처럼 실제 남주혁에게서도 특별한 기운이 느껴질지 궁금했다. 혹은 드라마 <스타트업>의 남도산처럼 공대생의 사고 회로를 지닌 엉뚱하고 멋있는 청춘의 초상일지, 혹은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이준하처럼 세상의 밑바닥을 경험하고도 온기를 간직한 청년에 가까울지 궁금했다.

의외로 남주혁은 무색무취했다. 중학생 때 농구선수로 뛴 이력이나 모델로 활동하다 배우가 된 이력에서 짐작하게 되는 에너지와 화려함은 어디다 숨겨놓은 걸까 싶을 만큼 조용히 환경에 녹아들었다. 그 무색무취함과 조화로움이야말로 배우 남주혁의 치명적 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제>에선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차례로 통과하는 대학생 영석이 되어 조제(한지민)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리메이크한 김종관 감독의 <조제>는 반짝 스타가 아닌 좋은 배우가 되고 싶은 남주혁이 또 한번 진심을 다해 몰입한 작품이다.

-지난겨울, 겨울이 주 배경인 <조제>를 찍었다. 겨울을 좋아하나.

=추위를 느끼며 일할 때의 겨울 말고 ‘쉬는’ 겨울을 좋아한다.

-촬영 순으로 보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 영화 <조제> <리멤버>, 드라마 <스타트업>까지 작품과 작품 사이 쉬는 시간 없이 쭉 달려왔다. 대본을 숙지할 시간도 빠듯했을 것 같은데.

=막상 닥치니 하게 되더라. 도저히 준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도전하지 않았을 거다.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작품에 들어가는 건 나 역시 원치 않는다. 이를테면 <스타트업>에서의 뜨개질도 <보건교사 안은영> 때 매듭 만들기를 해서인지 금방 손에 익더라. 다만 짧은 기간에 많은 작품을 해서 혹시 내가 연기한 인물들이 비슷해 보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은 컸다.

-<조제>는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개봉 당시엔 어려서 영화를 보지 못했을 테고, 언제 처음 원작을 접했나.

=영화가 개봉했던 게 2004년이니까, 그때 난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성인이 되고서야 영화를 알게 됐는데, 늘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막상 보지는 못했다. 그러다 2~3년 전쯤 영화를 본 것으로 기억한다.

-캐스팅 제안을 받았을 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개인적으로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기대하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청춘물에 잘 어울리는 20대 남자배우가 아니라, 연기로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컸다. 멋진 캐릭터만 맡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때 김종관 감독의 <조제> 시나리오가 들어왔다. 그동안은 이런 작품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조제>는 인물의 다양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야 하는 작품이었고, 그런 연기를 너무나 해보고 싶었다. 또 김종관 감독님이 만드는 <조제>는 어떨까 기대됐다. <폴라로이드 작동법>부터 <페르소나>까지, 감독님의 영화는 물론이고 뮤직비디오도 챙겨 봤다. 감독님이 연출하는 영상에 들어가보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읽고선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혹은 평범하지 않은데 평범한 이야기를 잘 만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쓰마부키 사토시가 연기한 주인공 츠네오와 <조제>에서 남주혁이 연기한 영석은 어떻게 같고 다를지 궁금하다. 영화 출연 당시 쓰마부키 사토시는 훈훈한 소년의 이미지로 사랑받는 일본의 라이징 스타였고, 그런 점에서 쓰마부키 사토시와 남주혁 사이 연결고리도 있어 보인다.

=쓰마부키 사토시, 정말 좋아하는 배우다. 이상일 감독의 <분노>를 보고도 다시 한번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조제> 촬영을 마치고 실제로 일본에서 쓰마부키사토시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올해 2월쯤 이누도 잇신 감독과 쓰마부키 사토시를 만나기로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 영석을 연기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을 가지고 어떻게 연기했는지 직접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연기할 땐 최대한 쓰마부키 사토시를 참고하거나 비교하지 않으려 했다. 아직 연기 내공이 부족해서인지 쓰마부키 사토시가 연기한 츠네오와 내가 맡은 영석을 비교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어갔다면, 분명 내가 만들어내고 싶은 영석을 만들지 못하고 따라갔을 것 같다. 어설프게 흉내내고 싶지 않았고, 나만의 영석을 만들고 싶었다.

-영석은 사랑과 욕망에 솔직한 남자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캐릭터를 이해하고 연기했나.

=영석은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그러다 우연히 조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잘해주고 싶고 더 큰 사랑을 주고 싶고 그래서 성공하기 위해 제 앞길만 보고 달려가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조제는 무엇보다도 영석이 옆에 있어주길 바란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데 영석은 내가 성장해야, 떳떳해져야, 당당해져야 이 친구를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조제>는 현실의 무게 앞에서 서서히 부식되고 마모되는 사랑 이야기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 비겁하고 부끄러운 사랑의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순간이 많았을 것 같다.

=영석이 조제에게 “옆에 있을게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대사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 말은 영석의 진심이었지만 결국 가슴 아픈 말이 되고 만다. 진심으로 했던 사랑의 고백이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점점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 자신이 뱉은 말이 기억나지 않기도 하고 지키지 못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연기했다. 정말 몰입했고, 그래서 괴롭고 힘들었다. 연기를 할 땐 늘 진심이다. 이 인물이 살아 있는 것처럼 연기하고 싶다. 그런데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도 많다. 그럴 땐 그냥 맡겨 버린다. 현장에서 느끼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주어진 조각을 맞추다 보면 퍼즐이 완성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목소리나 발음, 발성이 듣기에 편안하다.

=노력의 결과다. 스무살 초반까지만 해도 목소리가 가볍고 떠 있었다. 선배님들의 연기를 보면서 목소리가 주는 힘이 크다는 걸 알게 됐고 긴 시간 꾸준히 갈고닦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목소리나 발성법은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저 이렇게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게 부끄럽지만, 오래오래 이 일을 잘하고 싶기 때문에 계속 노력하고 있다.

-한지민 배우뿐 아니라 <보건교사 안은영>의 정유미, <눈이 부시게>의 김혜자, <안시성>의 조인성 등 특히 연상의 배우들과 케미스트리가 좋다. 혼자 돋보여야겠다는 욕심이 보이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여유가 눈에 띈다.

=선배님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아서 그런 것 같다. 신인인 나를 그저 좋아해주시고 챙겨주시고 칭찬해주셨다. 김혜자 선생님도 부족한 내게 늘 ‘잘한다, 잘한다’ 해주셨는데, 그럴 때면 그 마음에 보답하는 후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김혜자 선생님과 연기하는 게 어떻게 어렵지 않을 수 있겠나. 처음 <눈이 부시게> 대본 리딩할 땐 심장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아니 찢어졌다. (웃음) ‘에이 모르겠다’ 하고 리딩을 마쳤는데, 현장에선 무조건 캐릭터에 몰입했다. 상황에 몰입을 잘하는 편인데, 그러다보니 인물 대 인물로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잘했다기보다 주변에서 흔들리지 않고 편하게 연기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좋은 사람들과 일을 하면 나 역시 빛이 난다. 한마음으로 작품을 하면 모두가 빛이 나는 작품이 나온다는 걸 최근에 느꼈다.

-팀워크나 책임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중학생 때 농구선수 생활을 했기 때문인가.

=팀 운동을 해서 자연스럽게 그런 마인드가 생긴 것 같다. 농구할 때도, 혼자서 튀려고 패스해야 할 때 패스 안 하고 드리블하면 팀 전체가 힘들어진다. 득점, 패스, 어시스트, 리바운드 등 자기 기록을 위해 욕심내는 사람이 있으면 힘들다. 경기를 이겨도 기분이 찝찝하다. 농구할 때 감독님에게 지겹도록 들었던 얘기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였다.

-농구선수와 모델 일을 하며 키 큰 또래 집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정작 스스로는 큰 키나 외모 때문에 특별히 주목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운동할 땐 평범한 키였다. 농구부 고등학생 형들은 195cm쯤 됐으니까, 늘 올려다보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내가 작게 느껴졌다. 그때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 사람이 작다. 마음속 그릇은 크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서도 작다. 고무 그릇인 것 같다. (웃음) 고무로 만든 그릇.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젊은 나이에 인기를 얻으면 유혹에 빠지기도 쉽고 적당히 안주하고 싶은 마음도 들텐데, 몸과 마음의 건강함을 잘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건강한 기운이 있다.

=이 일을 하기 전까지 힘든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다. 만약 내게 건강한 기운이 느껴진다면, 더 열심히 성장하려는 모습이 보인다면 그건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어머니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부상으로 농구를 그만두고 모델 일을 시작했고, 모델을 하다가 우연히 연기도 하게 됐다. 연기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지금은 배우라는 직업이 너무나 소중하다. 연기를 시작하면서 10년 뒤의 목표를 세웠다. 10년 뒤엔 사람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배우, 남주혁이 아닌 작품 속 캐릭터로 기억되는 배우가 되고 싶다. 그 목표를 실현하기까지 10년을 잡았고, 지금은 그 과정을 묵묵히 통과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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