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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오늘은 SF] '환상특급'의 시대

‘환상특급’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것이 있는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 공중파 텔레비전에서는 외화라는 이름으로 외국 텔레비전 시리즈를 무척 많이 방영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한국 TV 프로그램 못지않게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화제가 되는 외국 TV 프로그램도 있었다. 그 시절 인기를 끌었던 <6백만불의 사나이>나 <맥가이버>는 지금도 한국 TV 프로그램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정도다. 누군가 괴력을 발휘하는 장면에서 <6백만불의 사나이> 효과음이 나오는 장면이나, 무엇인가를 멋지게 만드는 장면에서 <맥가이버> 주제곡이 배경에 흘러나오는 연출은 여전히 가끔씩 볼 수 있다.

<환상특급>은 그 정도로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강렬한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사람들이 적었다고 할 수도 없다. 원래는 미국에서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에 인기를 끌었던 TV시리즈 중에 <The Twilight Zone>이 있었는데, 그것이 1980년대에 다시 부활해서 새로운 에피소드들이 방영되었고, 그 새 에피소드들이 한국에 건너오면서 <환상특급>이라는 번역 제목을 얻게 되었다. 이 시리즈는 한국에서는 보통 단막극이라고 부르던 앤솔러지 구성으로 되어 있어서, 전체 내용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별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짤막하게 선보이는 형태였다. 주로 SF, 판타지, 공포 단편을 다루는 이야기가 많았고, 에피소드 하나만 맡으면 되기 때문에 신인 배우, 무명 배우들이 주연을 맡는 일도 꽤 있었다. 그래서 지금 돌아보면 유명 배우들의 초창기 모습을 언뜻언뜻 볼 수 있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사실 1960년대에 나온 원판 <The Twilight Zone> 역시 한국에서 방영된 적이 있다. 1975년 후반 무렵부터 MBC를 통해 ‘제6지대’라는 제목으로 더빙판이 방송된 것이다. 그런데 이 제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드물다. 나는 ‘제6지대’라는 제목을 기억하는 사람을 실제로 만난 적이 없다. 그에 비해, 1980년대판인 <환상특급>은 1986년부터 일요일 저녁 시간대에 KBS를 통해 방영되어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제6지대>와 달리 <환상특급>에 나온 절묘한 이야기의 놀라운 감성이나, 충격적인 결말을 보고 감탄한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을 실제로 만난 적도 여러 번이다. 유명한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면, 모든 것이 이상적인 미래 사회가 배경인데,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만한 인재는 그 좋은 세상을 불안한 쪽으로 바꿀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떤 아이가 시험을 너무 잘 보았다는 이유로 오히려 정부로부터 제거되는 처분을 받는 시대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입시 위주의 사회에서 더 강렬하게 다가올 만한 이야기였는지, 이 이야기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나는 1980년대에 세계적으로 잠시 SF의 부흥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E.T.>와 <스타워즈> 시리즈의 속편들과 같은 할리우드 SF영화들이 어마어마한 흥행을 한 블록버스터로 줄줄이 개봉되었고, 그와 동시에 <건담> 시리즈 같은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이 전세계의 TV 방송국에서 자주 방영되던 시대다. 1950년대 SF물 유행을 냉전 시기 사회 분위기와 연관 짓는 분석이 흔한 걸 생각해보면, 1980년대 레이건 집권기 미국의 강경 정책에 의한 신냉전 분위기가 SF 유행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SF 부흥기의 분위기를 타고, SF 소재가 풍부한 1980년대판 <환상특급>이 인기를 끌었다고도 풀이해볼 수 있을 듯싶다. 물론 그외에도, 충격적인 결말의 힘과 여운을 잘 살릴 수 있도록 3분, 8분 만에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아주 짧은 에피소드를 과감하게 편성했다든지, 컬러 텔레비전과 새 시대의 특수효과를 멋지게 사용한 에피소드들이 있었다는 점도 <환상특급>이 인기를 얻은 이유였을 것이다.

<환상특급>의 인기는 이 시리즈 하나의 인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어메이징 스토리>라는 비슷한 시리즈가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의 비슷한 TV시리즈 <기묘한 이야기>가 탄생한 데에도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유행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쳐서, 1990년대 초중반에는 <환상여행> <테마게임>같이 기이한 이야기를 다룬 단막극 시리즈들이 긴 시간 인기를 끌며 제작되었고, 심지어 방송사별로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코미디언이나 가수들이 주인공이 되어 “무슨무슨 극장” “무슨무슨 드라마” 등의 제목으로 짧고 강렬한 이야기들을 꾸며서 보여주는 내용이 몇년간 쏟아졌다.

세월이 흘러 OTT나 유튜브와 같은 새로운 매체가 등장한 2020년대가 된 요즘, 다시 새 매체에 걸맞은 강렬하고 짧은 단막극 시리즈를 부활시켜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넷플릭스를 통해 <블랙 미러>가 화제가 된 이후에, “한국판 <블랙 미러>를 만들어보겠다”는 제작사 관계자도 나는 최근에 여럿 만나 보았다. 심지어 미국의 OTT에서는 아예 <환상특급>을 새로운 시즌으로 다시 부활시키기도 했는데 아직까지는 딱히 큰 반응은 없는 것 같다. 무엇이 문제일까? 신인 배우, 신인 작가, 신인 연출자들이 과감한 시도를 실험적으로 선보일 수 있었던 1980년대판 <환상특급>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