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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02-05-31

편집장

중학교 다니던 사촌누나는 <아침이슬>을 가장 좋아했다. 아마 그에게 <아침이슬>은 연가였을 것이다. 나에게, 그리고 나와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아침이슬>은 성가였다. 많은 데모가가 있었지만, 그 노래만큼 부를 때마다 마음이 저려오는 노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아니 오래전부터 그 노래를 듣고 있기 불편하다. 90년대 초에 가장 싫었던 것 중의 하나가 술 마시고 헤어질 때 어깨동무하고 <아침이슬> 부르는 일이었다(요즘엔 그런 사람들이 사라진 것 같다). 우리 사는 꼴은 이미 <아침이슬>로부터 너무 많이 멀어져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미국의 로커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아마 대단한 부자일 것이다. 그가 95년에 를 내놨을 때 약간 놀랐다. 초기에 노동계급의 영웅으로 불리긴 했지만, 이미 돈방석에 올라앉은 지 오래된 가수가 갑자기 초심으로 돌아가 이민 노동자의 불행한 삶은 다룬 노래를 부른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 음반은 미국에서도 비평가들의 극찬을 들었고, 나도 구슬픈 하모니카 반주에 홀려 푹 빠졌지만, 노동계급의 영웅으로서 그를 좋아했던 사람이 그 음반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했다.

진정성이란 크고 무서운 단어다. 그 앞에 서면 발가벗고 내 속의 추함과 범속함을 고백해야만 할 것 같아 피하고 싶은 단어다. 먹고사는 일을 하다보면, 그 일이 밥솥이 아니라 글과 관계된 일이어서, 어쩔 수 없이 종종 그 앞에 선다. 그 불편함과 부끄러움을 어설픈 수사로 모면해보려 하지만, 그건 모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균열이나 결함이 그 자체로 의미있다는 말은 관대한 타인에 의해 혹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말해질 수 있는 것이지, 그걸 가진 장본인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김규항씨가 두번에 걸쳐 쓴 글 때문에 여기저기서 논란이 많았다. 그 글에 대해 당신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몇번 받았다. 우리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 글도 싣는다는 편집방침을 말하고, 그 필자는 자신의 글이 실리는 매체도 심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는 전력도 밝히지만 그걸로 충분한 대답이 되진 못한다. 그걸 알면서도 그 이상의 답을 하기 힘들다. 두뇌가 어떤 답을 준비하지만, 그걸 말하는 건 <아침이슬>을 부르는 것과 비슷해질 것이다. 대신 최보은씨의 반론을 싣는다. 그도 원했고 우리도 원했다. 그는 몸으로 글을 쓴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드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건 우리의 복이지만, 그 당사자에게 글쓰기는 자기학대를 동반한 고통스런 행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토요일 아침 5시40분까지 그 글은 오지 않고 있다. 힘든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