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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쾌락
2002-06-14

편집장

연극학자이며 축구광인 장원재 교수의 저서 <속을 알면 더 재미있는 축구이야기>는 빌 샨클리라는 원로 축구학자의 발언으로 말문을 연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를 국가간의 전쟁에 비유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축구를 사람이 죽고 사는 일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치솟아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다. 왜냐하면, 축구는 그런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건 정신나간 소리다. 아무리 축구가 좋다한들 사람이 죽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할 순 없다. 당연히 전쟁보다 더 중대할 수 없다. 이건 설명할 의욕조차 들지 않는, 상식이다. 그런데, 누구나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겠지만, 이 원로를 그 상식으로 설득한다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그는 축구에 ‘미친’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지고보면 우리도 정신나간 한달을 보내고 있다. 한 경제연구소는 한국의 월드컵 첫승이 14조원에 이르는 경제적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게 얼마나 타당한 수치인지 판단할 능력은 없지만, 그게 맞다 해도 월드컵이 4년 만에 찾아온 지자체 선거보다 중요할 순 없다. 축구에 정신 팔고 있다가 쓰레기 같은 자들이 시장이니 도지사 자리를 꿰차면 다음 월드컵 때까지 4년 동안 나라가 쓰레기장 꼴이 될 텐데, 그렇게 되면 14조원이 어디로 샐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사람이 별로 없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후보들이 선거 유세하고 있으면, 축구 보는 데 방해된다고 주민들이 욕을 한다고 한다. 우리가 정말 미쳐 있다.

그래서 나는 통쾌하다. 6월4일,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는 아름다웠다. 유상철의 골이 그날의 골로 뽑혔다지만, 난 그 좁은 각을 논스톱 슛으로 돌파한 늙은 황선홍의 골이 더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20년 넘게 한국 축구를 봐왔지만 가장 아름다왔다. 게다가 승리까지 했다. 그 마취적 순간에 지자체 선거 같은 ‘국가적 중대사’가 끼어든다면 정말 싫을 것이다. 그러다 나라가 개판 되면 어떡할 것인가. 잘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그냥 좋아하도록 내버려두면 좋겠다.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들의 근엄한 표정 대신 그 하찮은 게임의 승리를 위해 초원을 질주하는 육신의 율동에 넋을 잃도록 내버려두면 좋겠다. 그런데, 적어도 6월 한달 동안은 그걸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따돌림당할 것 같다. 그래서 통쾌하다.

지금 한국인의 월드컵 광풍은 좀 복잡한 현상일 것이다. 경제적 효과로, 혹은 국민 통합이나 애국심 고취라는 사회적 효과로 이 이상 열기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건전한 사람도 있을 테고, 거기서 일종의 파시즘적 집단주의의 싹을 보는 예민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건 취향이 명분과 계율을 압도하는 적어도 한국사회에선 드문 광경이다. 아마 이건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하찮은 영화 한편 한편을 붙들고 호들갑을 떠는 우리로선 아주 오래 남을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