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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그 감독들
2002-07-19

나는 1998년 3월부터 <씨네21>에서 일했다. 조선희 편집장으로부터 한국영화팀장을 맡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음, 일이 별로 많지 않겠군, 하고 생각하고 속으로 즐거워했다. 대단한 오판이었다. 1998년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믿기 힘든 일이 한국영화계에 벌어진 해였다.

상상치 못했던 놀라움을 선물한 사람들은 자신의 첫 영화를 선보인 젊은 감독들이었다. 당장 떠오르는 이름만 적어봐도, 허진호(8월의 크리스마스), 김지운(조용한 가족), 박기형(여고괴담), 장진(기막힌 사내들), 이재용(정사), 임상수(처녀들의 저녁식사), 이광모(아름다운 시절), 이정향(미술관 옆 동물원)…. <여고괴담>말고는 대박엔 이르지 못했지만, 관객은 그들 대부분에게 보통 수준을 훌쩍 넘는 환대를 표했고, 비평가들은 주기적으로 흥분했다. 환상적인 릴레이였다. 이 선수들이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누군가 이들 모두를 한결같이 지지하지 않는다 해도, 이런 새로운 재능을 한해에 넝쿨채 만난다는 건 한 나라의 영화계로선 다시 얻기 힘든 행운이다.

우리도 즐거웠다. 강팀의 월드컵 경기를 앞뒀을 때와 비슷한 즐거운 긴장감으로 신인 감독의 영화를 기다렸고, 그들은 매번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사소한 기쁨도 있었다. 거의 한달에 한번씩 사고치는 신인들이 등장해주니, 우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기획 아이디어를 짜내지 않아도 그들만 쫓아가면 새로운 기사가 만들어졌다(물론 한국영화팀의 일은 엄청 많아졌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폭발적 파워를 발휘한 건 그 환상적인 1998년 이듬해부터였지만, 개인적으로 1998년의 감흥을 다시 맛보진 못했다. 영화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존재, 우리를 가장 흥분시키는 존재는 감독이라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한국 영화산업의 성장은 물론 기분 좋은 일이지만, 거기에 감독의 힘이 2차적이라면 허전하다. 규모의 경제학이 한국영화계에서도 어느새 힘있는 논리가 돼버렸지만, 그 사이 많아야 두 번째 장편을 내놨을 뿐인 그해의 신인들은, <집으로…>의 이정향 감독을 말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감독의 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지지해준다.

이번호 특집으로 1998년에 우리를 흥분시켰던 감독들 중 몇 사람의 차기작 구상을 마련했다. 이중에서 민규동 감독은 김태용 감독과 함께 이듬해에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왔지만, 개인적으로 그해 최고의 한국영화라고 생각하며 그의 차기작이 많이 보고 싶었다. 그해, 그들을 처음 기다릴 때와 마찬가지의 즐거운 긴장감으로 그들의 신작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