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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감독
2002-07-19

나는 대중음악을 잘 모른다. 두어달에 CD 한장씩 사고 요즘 온갖 곡들이 담겨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최근 발견하고 마감 때 이것저것 듣는 게 전부이며, 취향은 아주 평범하다. 대중음악평론가를 가까운 친구로 두고 있고, 부서 내에도 대중음악전문가들이 서너명 있지만, 그들에게서 별로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보아의 을 듣고, 야, 죽인다고 느껴도 그냥 속으로만 좋아하고 발설하지 않는다(가요 순위 1위에 올라오는 곡을 음악전문가들은 안 좋아할 거라는 선입견이 내게 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델리 스파이스의 <챠우챠우>도 들어 있다. 1년 전쯤 버스에서 졸다가 이 노래 듣고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후아유>의 라스트신에 약간 감동받았는데, 그게 영화가 좋아서인지 그 대목에서 흘러나온 <챠우챠우>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 노래를 대중음악평론가들이 높이 평가한다는 걸 알았을 때 자연스레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평범한 청자인 내가 똑같이 좋아하는 노래들 중에서 어떤 건 전문가들이 칭찬하고 어떤 건 비판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

게으른 탓에 그 질문의 명백한 답을 찾진 못했다. 대중음악이 아닌 대중영화라면, 직업상 일반 관객보다는 좀더 많이 보고, 역시 직업상 영화책도 좀 뒤져본 덕에 한마디쯤 할 수 있겠다. 나는 <다이하드>는 재미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사상 최고의 액션영화라고 생각하며, <다이하드2>는 재미있고 잘 만들어졌지만 얄팍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평가의 차이는 <다이하드>가 속편에 비해 훨씬 풍부한 서브텍스트들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온다.

광이라 불리는 사람들 그리고 전문가의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서브텍스트들이 자신의 영화적(혹은 문화적) 기억이나 교양을 환기시키고 그것과 긴장할 때 쾌감을 느낀다. 가령 테러단 두목의 “이제 <하이눈>의 존 웨인 흉내는 그만 내시지”라는 비아냥에 브루스 윌리스가 “존 웨인이 아니라 게리 쿠퍼야”라며 이죽거릴 때, 이건 내러티상으로는 별다른 기능을 하진 않지만, 존 웨인의 영화적 이미지와 게리 쿠퍼의 영화적 이미지의 차이를 떠올리며, 또 게리 쿠퍼와 브루스 윌리스 캐릭터의 친연성을 발견하며, 은밀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다이하드>엔 이런 서브텍스트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반면 <다이하드2>는 줄거리와 스펙터클을 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다.

의미가 풍성하면 뭐하나 재밌으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할말 없지만, 나는 풍성한 서브텍스트를 지닌 대중영화에 늘 갈증을 느끼며, 20세기 영화사가 위대했다면 그 반은 재미 속에 다층적인 의미를 거느린 대중영화 특히 장르영화 덕이라고 믿고 있다.

사실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는데, <라이터를 켜라> 시사회에서 나도 모르게 박수가 나왔다. 간혹 보이는 흠을 트집잡고 싶다가 결국, 아무 생각없이 봐도 재미있고 이런저런 생각하며 봐도 재미있는, 좋은 장르영화라고 인정하게 됐다. 여하튼 물량 공세와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닌, 장르적 세공술과 두툼한 이야기로 승부하는 장르영화 감독이 오랫만에 나타나 반갑다.(그런데, 이 감독은 사람도 영화만큼 웃긴다. 이번호 특집을 보시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