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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좋아
2002-08-03

성이 아름답다는 말을 나는 믿을 수 없다. 내 메일박스엔 하루 20개 안팎의 광고메일이 들어온다. 그중의 반은 성인사이트 광고다. 그중의 어떤 걸 클릭해봐도 성은 아름답지 않다. 로그인은커녕 성인인증을 하기 전에 나오는 초기화면만으로도 충분히 그렇다. 저열한 언어들과 그에 꼭 맞는 자료화면들을 한번이라도 보지 않고 넘어가는 날은 하루도 없다. 모 사이트의 초기화면이 열려 여성의 항문에 남성의 성기가 박혀 있는 사진에 내 눈이 멈출 때, 성은 차라리 추하며, 그 이미지를 은밀히 즐기는 나의 욕망은 당당하지 않고 부끄럽다. 성은 너무 복잡하고 거대하고 고통스러울 만큼 어려운 문제다.

나는 감히 포르노를 완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담대하지 못하다. 예컨대 엄청난 크기로 확대된 남녀의 성기 사진이 담긴 광고판을 보며 거리를 걷는 일은 생각만 해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포르노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터넷 선진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인터넷이 가져다준 가장 큰 자유 가운데 하나인 포르노그라피에 접근할 수 있는 자유가 거의 무한정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아홉살 먹은 내 딸도 그리고 그 딸이 만나게 될 어떤 소년도 그런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신문기사는 초등학생 가운데 16%가 성인사이트 광고를 접해본 적이 있다는 조사결과를 전하고 있다.

포르노그라피를 일정한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것, 그게 근본적으로 가능한지 정당한지 모르겠지만, 그것에 반대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포르노적인 표현 자체를 금지한다는 건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이른바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다시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라는 제목을 단 진부한 논쟁은 실제로 성립될 수 없는 논쟁이다. 흉칙한 포르노그라피에서 예술성을 읽어내는 일이 범상한 행위가 된 지 오래다. 여성의 성기를 아주 외설적인 앵글에서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한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은 오늘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의 중심부에 당당히 예술의 이름으로 걸려 있다.

나는 포르노그라피와 단순한 포르노적 표현의 구분은 정교한 지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그 텍스트의 자질뿐 아니라 그 텍스트가 놓인 컨텍스트를 보면,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상식인보다 훨씬 뛰어난 감식안을 가진 사람들이 그 구분을 위임받은 곳이 등급위원회다. 그곳에서 <죽어도 좋아>를 18세 관람가가 아닌, 상영이 불가능한 등급외로 판정했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방송사 PD 출신의 멀쩡한 상식을 지닌 감독이고, 이 영화는 칸영화제에 초청될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내가 보기에 <집으로…>와 함께 올해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덜 자극적인 영화, 다시 말해 포르노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포르노그라피와 가장 멀리 떨어진 영화다.

이 영화에 성인도 보지 말라며 족쇄를 채우는 일은 경악할 만한 시대착오이며 거대한 위선이다. 우리는 표현의 무한 자유를 외치려는 게 아니라, 오용되고 있는 상식의 복원을 말하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이 쓴 훌륭한 글이 40쪽에 실려 있어, 이 글은 중언부언이 되고 말 테지만, 중언부언하면서라도 말하고 또 말하고 싶다. <죽어도 좋아>에 채워진 족쇄를 즉각 풀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