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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들
2002-08-10

노무현씨가 7월18일 중학교 일일교사 활동을 위해 길을 서두르다 교통위반 딱지를 떼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 봉변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두 가지 규칙이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묻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 교통질서을 위반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약속시간을 어기더라도 교통질서는 지켜야 할까요.” 토론이 끝난 뒤에 그는 “여러분이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규칙이 충돌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라고 덧붙였다.

노무현씨의 뛰어난 순발력을 알게 해주는 일화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동의하기 힘들다. 규칙이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며 공부한다고 알게 되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 우리의 국어교사는 자칭 ‘초현실주의’ 시인이었고 몇년이 지나면 한국문학사에 ‘절대공간파’라는 자신의 유파가 기록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는 3학년 담임이었고, 어떤 3학년 담임보다 열성적으로, 대학 못가면 ‘현실적으로’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입에 침을 튀겨가며 설파했다. 그는 두 가지 상반된 규칙을 편하게 오가고 있었다. 실은 대부분의 교사가 그랬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게 아니라, 가르칠 수 없다. 대학을 나오고 세상을 40년 겪고나니 더 모르게 된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부잣집의 보석을 훔치려는 사람이 직면한 규칙의 충돌에, 25년 전이라면 망설임없이 한 규칙을 지지했겠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차라리 그때와는 정반대의 규칙을 지지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래서 그때 그 국어교사와 그의 시를 모두 경멸했지만, 지금은 그의 균열을 이해하고 싶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영악한 사업가였다는 사실도.

나이 먹어갈수록, 갖가지 규칙이 충돌할 때 어떤 확신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오히려 신뢰하게 된다. 이 잡지에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코너를 쓰는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훈 선배가 며칠 전 갑자기 전화를 해 “그만 쓰고 싶다. 세상 일에 대해 어떤 명료한 판단도 할 수 없는 내가 그런 글을 계속 쓸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말렸고 계속 말리는 중이지만, 나는 그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어서, 그의 글을 믿고 존경한다. 우리의 필자 가운데 다수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나는 행운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규칙들의 커져가는 충돌음을 들으며 살다보면, 언젠가 마음이 지친다. 감당할 수 있는 용량이 사람마다 다 달라서, 지치다보면 제 몫을 못할 만큼 어리버리해질 때가 온다. 지금 내가 그런 때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살로 보이더라도, 좀 쉬기로 결심했다. 다음주부터 좀 쉬었다 오는 안정숙 전 편집장이 이 지면으로 인사를 다시 드릴 예정이다. 반갑게 맞아주시고, 좀 정신 차려서 다시 인사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