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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징징거리지 않는다
2002-08-30

편집장

그들은 오랜 동안 부모들, 특히 아버지들과의 싸움에 ‘청춘’을 걸었다. 성장기의 억압은 그들에게 어떤 상흔을 남겼나를 분석하는 일이 유행이었다. 집 밖에서는 또 다른 커다란 억압을 분석하고, 거기 맞서는 싸움이 오래 진행됐다. 바깥의 싸움이 지리멸렬해졌다. 그들을 불러내는 건 그런 싸움이 아니다. 엔터테인먼트를 닮은, ‘약간의 폭력도 있지만’ 본격적 유혈은 없고 컵 하나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그들의 정체를 알고 싶다는 욕망들이 곳곳에서 부글거린다.

전경과 고복수와 미래는 바로 그 세대의 젊은이들이다. 이들 역시 지난 시대의 싸움에 관심이 없다. 백은하 기자가 이번 특집에서 인용했듯 “세상을 바꾸는 건 죽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중심은 ‘나’다. 그래도 진화론자들은 이들에게서 지난 시간의 흔적들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그건 모든 수직적 권위가 이들 앞에서 위력을 잃어버렸다는 극중 ‘사실’이다. 드라마 속 사람들은 대체로 평등의 수혜자들이다. 억압의 피해자 자리에서 일어난 자식들은 대등해진 부모의 결함(비밀은 없다)까지 어루만진다. 담당형사가 남자주인공의 전과사실을 폭로했어도 동료들의 태도를 바꾸지 못한다. ‘어이, 전과자!’라는 애칭을 선사하는 계기가 될 뿐이다.

이 자유는 세상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에서 나온 것. <네 멋대로 해라>라고 제목이 지시하는 대로,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중력을 벗어나는 것이다. 세상은 거기 그대로 있다. 이들은 다만, 징징대지 않을 뿐이다. ‘드럽지만 쿨하게’ 패자의 패를 택한 이 개인주의자들은 우리 텔레비전 드라마에선 드물게 새로운 인물들이다. 욕망과 관습의 관성을 비껴나는 그들의 주법을 제시하는 형식 또한 빼어나다. 그래서 <네 멋대로 해라>를 이번의 특집으로 다뤘다. ‘요즘 젊은이’들의 정체를 그들이 사랑하는 드라마를 통해 알고 싶다는 욕망도 있었을 것이다.

영화칼럼니스트 황진미씨가 <오아시스>의 평을 보내왔다. 리얼리즘영화 <오아시스>가 제시한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들과 충돌하는 해피엔딩에 동의할 수 없다는, 비판적 견해가 담겼다. 우리 지면이 언제나 생산적 토론의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시사기와 <죽어도 좋아>의 재심의를 앞두고 마련한 충무로 검열의 연대기도 같은 효용을 발휘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