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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문
2002-09-13

신문사 편집국장 가운데 문화부 출신은 드물다. 한국사회의 권력 서열을 따라서인지 대부분 정치부나 경제부, 사회부 뭐 이런 부서를 거친 기자들이 국장자리까지 차지한다. 이유는 비슷한 것 같은데 문화부는 어느 신문사냐를 물을 것도 없이 인력난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요즘도 문화면을 펴보면 한면을 가득 채운 기사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기자 이름을 달고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아니, 흔하다.

그래도 요즘은 사정이 나아진 편이다. 한 사람이 두 분야, 심하게는 세 분야까지 ‘담당’하던 시절도 있었다. 전문화시대라 부르는 지금도 그렇게 거룩한 르네상스맨 역할을 해야 하는 이들이 아주 없어진 건 아니지만. 비판적으로 보자면 부실하기 짝이 없는 기사 생산시스템이지만, 문화부 기자 일을 오래한 나는 개인적으로 그 시스템 덕을 많이 봤다. 정말이다. 유달리 부족한 문화예술적 기초교양을 일하면서 습득할 수 있었다. 예컨대, 음악을 담당하게 됐을 때는 태어나서 처음 피아노 교습소에 등록까지 해봤다. 최단기간에 음악의 이해를 높이는 비결은 없을까요, 물었더니 작곡가 이건용씨가 피아노라도 한번 배워보라고 권했던 것이다. 공부는 부끄럽게도 세번인가, 네번 출석으로 끝나버렸다. 바빠서, 라고 변명을 할 수도 없는 것이 진짜 원인은 타고난 게으름이었다.

연극은 그래도 만만해 보였다. 이곳엔 대사가, 희곡이 있다, 음악이나 춤의 언어보다는 문자나 문학의 언어가 친숙하다! 국어교과서마다 희곡들이 실려 있기도 했고. ‘그래도’란 말이 잘못의 시작이었다는 점을 깨닫는 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연극이 대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대사만 해도 그렇다. 한국 연극은 그때쯤, 서구식 발성을 제스처와 함께 버리고 한국어에 맞는 호흡법을 찾아낸 뒤였다.

가난 속에서 한국 연극이 연마한 기량을 먼저 보여준 이들은 다 알다시피 배우들이었다. 신구, 전무송, 문성근, 최종원, 방은진, 송강호, 설경구…. 그들이 없는 한국영화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다. 연극연출가들의 월경은 오히려 뒤늦은 일일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의 유산이 영화를 풍요롭게해온 다른 나라의 경험이 겹쳐, 연극에서 영화로 무대를 옮기는 이곳 연출가들의 행보를 지켜보게 만든다. 이윤택, 박광정, 이수인. 서로 다른 지점에서 한국 연극을 만들어온 세 ‘신인 감독’을 이번호 지면에 초청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