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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2003-04-11

그래도 세상은 좋아질 것이다. 그 속도가 너무 느려서 느끼기 힘들 지경이라도. 10년 동안 그렇게 믿을 수 없었지만, 지난해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대량학살자가 누구인지가 더욱더 분명해진 더러운 전쟁의 와중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내가 가장 믿는 사람들은 지식인도 검사도 (당연히) 정치지도자 같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거리에 나가면 그냥 별 생각없이 왔다갔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보통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 생각없이 영화나 보러 다니고, 심심하면 게임이나 하고, 하루종일 만화책이나 뒤지고, 인터넷 들어가서 치밀하지도 않은 주장을 늘어놓으며 괜히 흥분하고, 모이면 어제 본 TV프로의 연예인 스캔들 얘기로 수다 떨던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맨 먼저 거리에 나서서 촛불을 들었고, 지금 가장 열렬히 반전과 평화를 외치고 있다. 영웅적 지도자 없이도 정교한 정치 노선과 세련된 이념과 조직 없이도, 지금 가장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 지식과 전문성과 권력이 죽쑤고 있는 동안, 특별한 사람들이 말로 치고받으며 하찮은 싸움을 벌이고 있는 동안, 지식과 전문성과 권력과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 “저렇게 아무 생각없이 사니 앞날이 걱정된다”는 소리를 듣던 그런 사람들이 지금 가장 지혜롭고 가장 당당해진 것이다. 특별한 사람들이 멍하게 지켜보거나 또다시 복잡한 얘기로 전략을 고민하고 있는 그 앞에서.

그래서 세상은 좋아질 거라고 믿는다.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좋은 영화를 볼 때, 설명할 순 없지만 그 영화를 확신하는 것처럼 그렇게 확신한다. 어느 TV프로에서 더할 수 없이 사이좋게 노는 개와 고양이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시골 할머니가 “저놈들이 저러니, 세상이 좋아지려나 봐유”라고 말할 때, 그 할머니의 지혜를 믿듯이 그렇게 믿는다. 마음 약한 김혜리가 병원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다가와 손을 덥석 잡으며 “아가씨 손톱은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칠했어. 나도 가르쳐줘”라고 말한 낯선 아줌마의 그 무한한 친밀함을 믿듯이 그렇게 믿는다.

노무현을 당선시킨 건 그들이다. 지금의 노무현이 어떻든, 그들은 노무현이 누구나 친구처럼 대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뽑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친구로 맺어질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을 없앨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를 뽑은 것이다. 부시가 나쁜 것은 그가 친구관계 대신 상하관계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과는 같이 놀 수 없다. 같이 놀려면 친구가 돼야 한다. 월드컵이 신났던 건 너무 멀리 떨어져 혹은 너무 다르게 생겨 이상했던 인종들이 모두 같이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렇게 돼야 한다. 아무 생각없이 같이 놀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지구 곳곳에서 지금 힘겹게 반전을 외치고 있다. 같이 놀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그렇게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러니 당장 전쟁을 멈출 수 없더라도, 세상은 좋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