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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2003-05-09

<씨네21>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나이는 20대 중반부터 40대 초반에 걸쳐있다. 나는 40대 초반이다. 평소엔 그냥 어울린다. 어울리다 보면 그냥 친구 같고, 물리적 나이 차이가 별로 의식되지 않는다. 내 또래보다 20대와 훨씬 잘 통하고 더 가깝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가 김영하씨는 또래의 남자들과 어울리기 싫은데, 그 이유가 한국 남자들은 자기 또래의 낯선 남자들을 만나면 거의 본능적으로 기싸움을 걸거나 나이와 학연 지연 따위를 확인하려 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자들이 그러는 건 그건 저 사람이 나의 적인지 동지인지 확인하기 위해 혹은 자기보다 위인지 아래인지 정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가끔 다른 생각이 든다.

일 끝나고 밤 늦게 가진 술자리에서 한 20대 여자 후배에게 “세상이 좋아지려면 뭐가 바뀌면 좋겠냐”고 무심하게 물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남자 친구하고 사이가 더 좋아지면 좋겠고, 엄마가 안 아프시면 좋겠고…” 당황했다. 민족이나 국가 같은 단어는 당연히 안나오겠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의 어떤 점을 말할 줄 알았는데…. 속으로 ‘아니, 이렇게 생각이 없을 수가!’ 생각하며 말을 더듬고 있는데, 눈치 빠른 또다른 20대 후배가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주었다. “우리 세대는 사회를 직접적인 위협으로 느낀 적이 없어요.”

내가 속한 세대의 다수는 위협 정도가 아니라, 사회가 나를 살해할 지 모른다는 물리적 공포를 느끼며 20대 초반을 보냈다. 내가 아는 몇몇은 사실상 살해되기도 했고, 시대의 근심으로부터 비롯된 어떤 이들의 죽음을 바로 눈 앞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지금도 봄꽃 향기를 맡으면, 그 속에서 최루탄 냄새를 느끼며 본능적으로 몸이 긴장해온다. 시대적 죽음의 행렬은 그 냄새와 함께 우리 곁을 지나갔다. 나와 가까운 친구들의 90년대는 그런 기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애쓴 연대였다. 도피가 완전하게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성공이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 그 기억은 잠복해있다가, 어떤 사건과 함께, 어떤 사람과 함께, 어떤 냄새와 함께 끊임없이 되살아온다. 때론 <살인의 추억>과 같은 영화와 함께.

우리 세대의 불행은 나의 소망이 나를 경유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억압하며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 소망은 거짓이 아니었지만, 나에게 온전히 속할 수도 없었다. 나는 세상이 좋아지는데 필요한 조건을 말할 때, 남자 친구와 엄마를 말하는 그 후배의 마음이 사실은 부럽다. 내가 그 마음을 갖지 못하는 건, 더 멀리 봐서가 아니라, 공포로부터 결국 벗어나지 못해서다. 그 후배는 <살인의 추억>을 진정으로 좋아하지만(세번 봤다고 한다), 나는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그의 대답을 진심을 담아 할 수 있을까. 아마 평생 못할 것 같다. 사회적 소망을 말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내 육신의 쾌락만을 말할 것이다. 내 소망엔 나와 세상 사이의 매개가 없었다. 그래서 세상의 공포를 잊으려고 작정한 순간부터, 나 이외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게 됐다.

남자 친구와 엄마에 대한 근심에서 세상의 변화를 말하는 그 후배를 잠시 생각 없는 사람으로 여겼던 내가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