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오바
2003-05-31

김병욱은 방송사 PD다. 그것도, 일일시트콤이라는, 드라마보다 더 열등한 장르로 여겨지는 분야에서만 일해온 사람이다. 그가 5년 동안 만들어온 <순풍 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똑바로 살아라>는 중학생도 웃길 수 있는 심심풀이용 코미디다. 김병욱 PD는 그런 목적으로 그 시리즈를 연출했고 결과적으로 그 목적을 이루었다.

우리는 그를 작가라고 부르고 싶다. 여기서 작가는, ‘글 쓰는 사람’이란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스타일과 세계관에서 독창성과 일관성을 지닌 소수의 감독을 일컫는 영화비평계의 용어로 썼다. 예술은 고뇌와 사색의 성에서 태어나기도 하지만 더러운 시장판에서도 태어난다. 문학과 연극이 그랬으며, 무엇보다 영화가 그랬다. 이창동 감독이 최근 한 문학잡지 좌담에서 영화를 창부의 자식으로 비유해 화제가 됐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창부의 자식이라 해도, 양갓집 규수의 옷을 입고 있다.(이창동 감독은 그 옷만을 칭송하는 소리를 듣고 있기 불편해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작품 속에 감춰진 속물성과 천박함을 자조하는 사람이어서 그런 말을 했다고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시트콤은 외모에서부터 천민이다. 한심한 인간들이 어처구니없는 언행으로 웃음을 파는 천박한 상품이 시트콤이다.

우리는 공장 생산품처럼 쏟아져온 그의 시트콤에서 하나의 세계를 본다. 그 세계는 단번에 눈에 띄진 않았지만,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제 누구도 넘보기 힘든 독창적 소우주가 됐다. 고상한 진술과 심각한 표정이 아니라 ‘천박한 것들’이 한데 모여 절절한 화음을 만들어낼 때, 우리는 더없이 감동한다. 김병욱의 시트콤은 인간의 쩨쩨함과 소심함에 관한 한 어떤 걸작 못지않은 통찰을 드러내지만, 감동은 그 통찰 자체가 아니라(누가 공부하려고 시트콤 보진 않는다), 그 통찰이 싸구려로 취급받는 양식과 한몸을 이루는 순간 찾아온다. 그런 순간을 발견하고, 호들갑을 떠는 일은, 잡지 만들어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1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김병욱 시트콤의 주된 웃음거리가 ‘오바’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바했다(참고로, 김병욱은 ‘오바’를 보여주다가 종종 그걸 시큰둥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등장시켜 서늘하게 웃긴다. 그는 자기 검열이 철저한 사람이다).

김병욱 PD의 열혈 팬인 김혜리는 독자들이 이 특집을 보고 ‘이것들이 왜 이러나’라고 말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어쨌든 김병욱 특집을 준비하는 일은 그래서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