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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직업상 TV를 자주 보지 못하지만, TV를 좋아한다. 슬플 때나 기쁠 때처럼 감정이 선명할 때 TV는 별 필요없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대개 선명하지 않다. 짜증날 때, 괜히 울화가 치밀 때, TV는 도움이 된다. 그냥 켜놓고 아무거나 멍하게 쳐다보고 있으면, 혹은 켜놓고 딴 데 보고 있어도, 마음이 좀 편해진다. 때론 잠들기 위해 TV를 켠다. 그럴 때, TV는 내가 그를 돌보지 않아도 내게 아부하는 지상의 유일한 존재다.

그러다 가끔 뜻밖의 즐거움도 얻는다.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다 <옥탑방 고양이>를 두어번 봤다. 나는 정다빈이나 김래원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 둘 다 귀여웠다. 정다빈이 연기한 정은의 캐릭터가 특히 흥미로웠다. 당사자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정다빈이 밉게 생겼다고 느낀다. <명랑소녀 성공기>의 양순(장나라)은 전형적 미인은 아니지만 충분히 예쁘게 보이며 그렇게 보이도록 드라마가 도와줬다. 그러나 <옥탑방 고양이>의 정은은 그런 조력을 얻지 못한다. 그냥 맨 얼굴로 밀고 간다. 그는 예쁘지도 않고 학벌도 썩 좋지 않고 가난하지만, 그게 불편하고 속상할 뿐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비슷한 설정의 다른 영화나 드라마처럼 천사의 마음씨나 수퍼우먼의 능력을 부여받아 유사 신데렐라로 꾸며지지도 않는다. 그런 소박하고 범상한 모습에 이현우는 이성으로서 마음이 끌리는 모양이지만, 난 그렇진 않다. 그런데도 그들의 소동은 귀엽고 재미있다. 왜 재미있는지는 이번 호에 정한석이 인터넷 소설에 관해 쓴 글을 보고 더 잘 알게 됐다(42쪽).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끝난 <천년지애>와 <내 인생의 콩깍지>도 기껏해야 서너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재미있었다. 두 드라마는 말이 안 된다. <천년지애>는 남부여 공주가 오늘의 한국에 떨어졌다는 설정부터 말이 안 된다. 공주가 “어떠냐. 나 예쁘냐”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투로 질문하는데 두 청년은 심각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더 웃긴다. 더구나 두 청년 중 한명은 야쿠자영화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비장한 표정의 일본인이며, 다른 한 청년은 트렌디 드라마에 딱 어울리는 날라리 디자이너다. 이질적이기 짝이 없는 주인공 셋이 모여 태연하게 심각한 사랑의 삼각관계를 만들어낸다. 그 태연함이 재미있다.

<내 인생의 콩깍지>는 트렌디 드라마로 시작하는데, 놀랍게도 뮤지컬로 간다. 연기하다가 갑자기 노래하고 춤춘다. 뮤지컬영화에서 흔히 하는 짓이긴 하지만, TV에서 그걸 보니 놀랍고 재미있었다. 나는 뮤지컬을 영화장르 중에서 가장 행복한 장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뮤지컬이 서사의 고전적 규범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방식으로 즐거움을 전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영국의 영화지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실린, 평론가 그룹과 감독 그룹이 뽑은 영화사 베스트 10에 <사랑은 비를 타고>가 동시에 오른 것도 뮤지컬 장르의 그 무구한 즐거움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진짜라고 억지 쓰기는커녕 가짜라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태연하게 밀고 갈 때, 아주 잘 꾸며진 이야기와는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준다. 그런 즐거움을 요즘 TV에서 심심찮게 맛본다. TV는 종종 꽤 괜찮은 친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