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먹먹함

슬픔에도 등급이 있다면 그 마지막 단계쯤에 해당하는 말이 ‘먹먹하다’가 아닐까 싶다. 대성통곡이라는 것도 남이 내 슬픔에 공감할 기회를 주거나 아니면 여기서 무너지지 않겠다는 자기 보존의지의 표현이라고 느껴진다. 그런데 마음이 먹먹해지면 그것마저도 귀찮아진다.

나는 이런 유의 먹먹함을 느낀 적이 있다. 어떤 죽음에 대면했을 때의 일이다. <씨네21> 창간 당시 기자로 입사해서 잡지 만들 준비하느라 정신없던 나날이었다. 나는 그 죽음 앞에 멀뚱히 서서 나에게 물어보았다. 만약 메피스토펠레스가, 떠난 영혼을 돌려줄 테니 너의 영혼을 내놓겠느냐고 흥정해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 일을 전후로 성수대교가 끊어지고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았다. 개인의 붕괴와 사회의 붕괴가 강렬한 하나의 이미지로 결합되어 꿈에 나타났고, 사막처럼 뜨겁고 건조한 허무, 조와 울이 교체하는 생의 리듬이 몇년이나 지속되었다. 그 죽음에 엉킨 개인과 가족, 사회와 제도의 문제에 대해서, 분석하기 좋아하는 나는 아직까지 분석을 시도하거나 정색하며 입 밖으로 꺼내질 않았다.

요즘 나는 그때의 공포와 인위적 기억 상실을 억지로 환기당하는 듯한 기분이다. 태연한 얼굴로 웃고 떠들며 저항하지만 이번주 <씨네21> 특집 때문에 다시 무언가에 사로잡히지 않을까 조금은 겁이 난다.

영화 을 만든 이수연 감독은, 만나본 적 없지만 아마도 용한 무당 같은 사람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그는 고층건물에서 투신하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 무당처럼, 죽은 혹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들의 추락과 함께 붕괴하는 한국사회를 묘파한다.

올 여름 유독 기승을 부린 공포영화가 마치 예언이라도 되었던 듯이, 우리는 지금 줄줄이 이어지는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 그것도 한줄기 낭만이나 육체의 존엄까지 깡그리 거두어버리는 투신이라는 격렬한 형태로.

더이상 먹먹해지기도 분석하기도 싫은, 나처럼 냉정한 다수를 향해 그들이 영화 속, 영화 밖에서 몸을 날리며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