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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식으로

이번주 <씨네21>을 만들고 난 소감은, 여울목을 향해 여러 길목에서 덮쳐오는 물의 이미지다. 세상의 물은 게으른 듯 한데 엉켜 이리저리 일렁이다가, 불현듯 튀기고 쪼개지며 격렬하게 내달린다. 지금 보이는 물은 후자다. 그리고 나 자신이 세 갈래 길로부터 쏟아져오는 그 물세례 속에 잠긴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 어딘가를 향해 함께 흐르고 있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은 ‘영화적 행동주의’가 거둘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결실을 맺을 모양이다. 감독은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목적이란 딱 한 가지, 부시 낙선이었다고 밝히며 개봉 전후로도 쉼없이 입을 열어 조지 부시를 낚으려 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가 반부시 진영에 유용한 문화적 무기가 되는 데에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이 큰 기여를 했으니, 정통 미학주의자들의 떨떠름한 기분에도 불구하고 올해의 칸과 프랑스는 스스로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의미있는 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김도훈 기자의 말대로 미국 대선 결과를 기다려볼 일이다.

7월16일 <화씨 9/11> 개봉을 앞두고 있는 한국 영화계에서는 오래된 이슈 하나가 새삼스레 솟아오르고 있다. 스크린쿼터를 축소할 때라는 이창동 문화부 장관의 발언이 소강 상태에 접어든 듯 보였던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을 현안으로 불러내고 있는 것. 이 문제에 오랫동안 헌신해온 영화인들의 혜안은 두 가지로 모아진다. 쿼터 축소 불가피론은 한마디로 사기에 다름없는 말장난이라는 것이고, 쿼터 유지와 더불어 한국 영화계 내부의 다양성 확보 노력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영화계 내부에서 다양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문제는 매우 시급한 현안으로, 스크린쿼터 정책이 이 문제를 끌어안지 못한다면 국내 자본을 위한 또 하나의 보수적인 논리로 전락할 수도 있는 중차대한 요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있는 사람들은 내부의 다양성이 외부, 그것도 미국에 빗장을 여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이 모든 일에 앞서 지난 한주 동안 우리는 세기의 다큐멘터리 한편을 보았다. 희미하게 뭉개진 짧은 동영상 한편이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조차 결코 감당하지 못할 깊고 넓은 충격을 주었는데, 바로 “나는 살고 싶다. 한국군을 이라크에 보내지 말아달라”는 김선일씨의 모습이다. 그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극적인 방식으로, 미국 자본주의의 탐욕과 가증할 테러리즘이 약소국인 한국과 그보다 더 약소국인 이라크 민중에게 불러일으킬 참화의 예고편을 상영해주었다. 이 전율할 만한 예고편을 보는 우리는 어떠한 본편 다큐멘터리를 준비할 것인가. 다행인 것은 “그래 너 이라크, 한번 죽어봐라”고 팔 걷어붙이는 한국인보다는 지구촌 전체의 평화라는 관점에서 사태의 본질을 넓게 파악하는 지혜를 갈망하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영상은 돌연 이런 식으로 현실과 관계맺으며, 역사는 바로 이런 식으로 개인에게 질문을 던진다. 한국민 전체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주고 본향으로 되돌아간, 이 세상에서 큰 몫을 다한 김선일씨의 영혼이 안식하기를 바란다.

김소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