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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에 관한 기억

나는 꽤 오래된 김기덕의 지지자다. 그가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게 낯간지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간 김기덕을 지지하는 일이 쉽지 않았음을 고백해야겠다. 1996년 <악어>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감동했다. 한강 물밑에서 죽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이 숭고한 종교적 기적처럼 보였다. 나는 당연히 남들도 그렇게 느낄 거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당시 <악어>를 본 평론가나 기자 누구도 이 영화를 지지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그때 난 풋내기 영화기자였다. 좋은 영화로 판단했다고 <악어>의 훌륭함을 다 표현할 능력이 내겐 없었다. <악어>를 좋게 본 평론가가 있을까? 나는 애타게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내가 글로 쓰지 못한 이 영화의 진정한 새로움을 누군가는 봤을 것이라 믿었다. 내가 아는 한 그해 <악어>를 지지한 유일한 평론가는 정성일씨였다. 그의 글은 김기덕 감독뿐 아니라 내게도 큰 위로가 됐다.

나는 김기덕 감독이 한동안 다음 영화를 못 만들 줄 알았다. 흥행과 비평 어느 쪽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그가 기회를 잡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김기덕은 나의 예상을 기분 좋게 배신했다. 이듬해 <야생동물 보호구역>이 나왔다. 물론 반응은 <악어> 때와 비슷했다. 아니 그보다 처참했다. 이번엔 정말 그를 지지하는 어떤 글도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조바심이 일었다. 이렇게 묻힐 감독이 아닌데, 이렇게 외면받을 영화가 아닌데, 그런 심정으로 난 김기덕 영화를 지지하는 비평문을 쓰겠노라 나섰다. 여전히 모자란 필력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쓰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 글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김기덕 감독을 만났다. 그날 그는 슬픈 얼굴로 내게 물었다. “정말 내 영화가 좋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는 많이 지쳐 보였고 크게 낙심했으며 깊이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다. 난 김기덕의 좌절이 매우 안타까웠고 능력이 닿는다면 나의 글로 위로하고 싶었다.

불면의 밤이 새삼 떠오른다. 내 공력으로 그의 영화를 설명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가망없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마감은 다가왔고 나는 <씨네21>에 2쪽 분량의 영화읽기를 쓰느라 기진맥진했다. 물론 쓰면서도 부끄럽다고 느낀 엉성하기 그지없는 비평이다. 하지만 그때 그 일을 잊을 수가 없다. 물론 나도 프랑수아 트뤼포가 히치콕을, 앙드레 바쟁이 로셀리니를, 도널드 리치가 오즈를 재발견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트뤼포도, 바쟁도, 리치도 아닌 것을. 좌절했지만 교훈은 명백했다. 영화에 관해 어떤 발언을 하는 일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 남들 눈치를 봐서 숟가락 하나를 더 얹는 일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때로 여론에 역행하는 외로운 싸움일 수도 있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이 직업에 윤리가 있다면 그걸 인정하는 것이다. 진정 훌륭한 감독이라고 믿는다면 그의 편에 서서 남들이 던지는 돌을 함께 맞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런 아픔을 공유할 때 비로소 영화의 벗이 될 수 있다.

나는 <빈 집>의 베니스 수상이 정말 기쁘다. 그건 한국영화의 위상을 높여서라거나 김기덕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 바뀔 것이라서가 아니다. 나는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로 김기덕 감독의 수상소식이 반가웠다. 9년 전 나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해서 뿌듯했고 8년 전 불면의 밤이 헛되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급히 잡힌 시사회에서 미리 본 <빈 집>은 상을 받을 만한 영화였다. <빈 집>에는 상영시간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이승연이 “사랑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지난 9년간 김기덕 영화가 간절히 구하던 것이 이 한마디라고 생각한다. 김기덕은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다. 그래서 피를 흘렸고 낚싯바늘을 집어넣었다. 나는 그의 11번째 영화에서 마침내 듣게 된 “사랑해”라는 말에 소름이 끼쳤다. 언뜻 희망으로 보이는 그 말이 차마 견딜 수 없어서 내뱉는 절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김기덕은 이제 한 장면 안에 완벽한 희망과 완벽한 절망을 함께 담아내는 거장이 됐다. 나는 그가 고맙다.

이번호는 한가위 특대호다. 이번주가 지나면 추석 연휴가 낀 한주를 쉬고 독자 여러분과 다시 만날 것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도 풍요로운 가을이 되시길….

남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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