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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블레스 아메리카

부시가 이겼다.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 영화 시나리오로 치면 최악이다. 거의 스너프필름 수준이다. 목을 따고 시체를 절단하는 끔찍한 살인을 저질러도 스너프필름에선 결코 악당이 처벌받지 않는다. 전세계가 악당으로 지목한 부시가, 이라크에서 수십만, 수백만명을 살해하고 아이들을 불구로 만든 전쟁광 부시가 다시 4년간 미국 대통령이 된다는 이 결말은 스너프필름보다 더하다. 미국은 지금 스너프필름의 살인자에게 앞으로 4년간 맘껏 활보해도 좋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다.

미국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언론에 따르면 이번 선거의 판세를 갈라놓은 것은 백인 개신교 신자란다. 한적한 시골에 살면서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고 가족과 바비큐 파티를 벌이는 가정, 그들에게 이라크인의 죽음은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해보니 나도 이런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다.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얼마간 오해나 편견이 개입될 여지가 있지만 내가 군대에서 만난 백인 개신교 신자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착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시골 출신이었고 세상 물정에 어두워 보였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고향에 가서 식당이나 주유소를 하겠다는 꿈을 가진 청년들이었다. 그 친구들이 이번 선거에서 부시의 지지자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우울하다. 전쟁과 학살의 공범자가 된다는 생각은 꿈도 못 꾸고 가족과 국가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말에 순진하게 속는 사람들이 이번 선거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긴 부시가 신의 이름을 들먹이고 선명한 선악구도로 현실 정치를 설명한 것이 이런 사람들에게 꽤 잘 먹혔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부시 재선의 일등공신일까?

내 생각엔 사태의 원인을 백인 개신교 신자들이 멍청해서라고 단정짓는 건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부시가 보수층이 옹호하는 도덕적 가치를 주장해서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전쟁 중에 사령관을 바꾸지 않았다(그러니 우리도 본받자?)는 표현에선 호전적 냄새까지 난다. 나는 이런 주장들이 책임회피성 발언 같다.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쪽은 아무래도 미국 언론, 특히 방송사들이 아닐까? 방송사들은 공정한 TV토론을 진행했고 선거 전날엔 <화씨 9/11>을 방영하는 결단까지 내렸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바로 그들이 미국 전역을 애국주의 열풍에 휩싸이게 만들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지난 3년간 미국 언론은 너나없이 테러와 전쟁이라는 거대한 볼거리에 힘입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경쟁에 들어갔다. 덕분에 시청률은 올랐지만 이라크전에 관해서도, 부시 행정부에 대해서도 그들은 충분한 진실을 전달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백인 개신교 신자들의 일상은 주일에 교회에 가는 것만큼 TV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방송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데 이번 미국 대선을 분석하는 기사들은 대체로 방송과 언론의 기여에 대해 무관심하다. 선거 결과에 대해 자기들만 쏙 빼놓고 원인을 진단하는 이유는 자기들은 공정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또는 방송이란 원래 반성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인지도. 결과로 원인을 뒤엎는 그들의 수사는 한마디로 파렴치하다. 도덕과 가족을 앞세운 부시의 구호가 보수층을 자극했고 결집시켰다고? 그런데 그 구호가 먹히도록 잔뜩 분위기 잡는 음악을 깔아놓은 건 누군데? 히틀러의 나치즘에 선전장관 괴벨스가 기여한 것 이상으로 미국 언론이 부시 재선에 기여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한계일까? 새로운 파시즘의 징후일까? 아무튼 미국은 전보다 사악해졌다. 부디 신의 은총을. 갓 블레스 아메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