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나쁜 상상력에 재갈을

유서 깊은 유럽의 몇몇 도시에는 고문박물관이라는 게 있다. 유명한 런던탑에도 중세의 고문기구를 전시한 방이 있지만 체코의 프라하 같은 도시에서도 이런 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몇년 전 우연히 고문기구를 구경하다가 몸서리를 쳤던 적이 있다. 중세 유럽에서 다양한 고문이 이뤄졌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실물로 대한 고문기구들은 나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었다. 록밴드의 이름으로 잘 알려진 아이언 메이든만 해도 그렇다. 주물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그 안에 쇠창살을 박아놓은 이 기구는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두눈과 심장을 찌르도록 되어 있다. 두눈을 향해 다가오는 쇠꼬챙이를 보면서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은 무슨 얘기든 순순히 불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던 나라에서 이런 발명품이 나왔다는 게 아이러니지만 터무니없는 일도 아니다. 예수가 살해된 방식을 떠올려보라. 십자가형은 그 잔인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반골 기질의 감독 짐 자무시를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문받는 예수상을 보십시오. 너무도 끔찍한 형상입니다. 그걸 상징으로 경배하는 문화, 그것이 서구 문명입니다.” 물론 이런 잔인한 상상력이 서구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고대 중국의 처형 방법도 중세 유럽의 고문 못지않다. 시황제의 진나라에서는 온몸에 먹물을 들이고 코를 베고 팔다리를 절단하고 머리를 자르고 시체를 소금에 절이는 사형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장철의 영화 에서 충격적으로 보여주듯 사람의 몸 여섯 군데에 밧줄을 묶어 동시에 말이나 마차가 끌게 만든 능지처참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사형제도에 비하면 머리를 베거나 사약을 내리는 건 무척 자비로운 방법처럼 보인다.

이런 예를 보면 인간의 상상력이란 것도 무조건 찬미할 대상은 아닌 것 같다. 인간은 고문과 살인에 있어서 뛰어난 발명품을 수없이 만들었다. 지금은 중세 고문기구를 사용하는 일이 없겠지만 핵폭탄, 독가스 등 악독한 무기는 여전히 만들어진다. 지뢰도 그중 하나다. <노 맨스 랜드>의 마지막 장면은 한 남자가 지뢰에 누워 꼼짝달짝 할 수 없게 된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현재 기술로는 이 남자를 살리면서 지뢰를 제거할 방법은 없다는 절망적 소식으로 끝을 맺는다. 이 장면은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훌륭한 알레고리이기도 하지만 잔인한 살상무기인 지뢰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도 의미있다.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지뢰는 쉽게 제거될 수 있거나 크게 위험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돼왔지만 <노 맨스 랜드>처럼 끔찍한 상황도 충분히 가능하다. <노 맨스 랜드> 못지않게 인상적인 영화로 <칸다하르>가 있다. 이 영화에는 적십자 구호품으로 낙하되는 의수와 의족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모두 지뢰의 희생자들이다. 상대 전투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설치한 대인지뢰는 목숨을 빼앗는 대신 손이나 발만 잘라내는 무기다. 지뢰는 일단 설치되면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할 수 없기에 수많은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이 손과 발을 잃었던 것이다(대인지뢰만 문제삼는 이유도 이것이다. 모든 무기를 없애면 더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가장 비인간적이고 극악한 무기만이라도 없애야 한다).

지금 인류는 수많은 고문기구와 처형방법을 고안한 고대인에 비해 얼마나 진보한 것일까? 대인지뢰의 존재는 인류의 나쁜 상상력이 여전하다는 걸 입증하는 사례다. 남의 일이 아닌 것이 대인지뢰는 전세계 어느 나라보다 한반도에 많이 남아 있다. 비무장지대는 문자 그대로 무기가 없는 곳이 아니라 지뢰밭이고 해마다 홍수가 나면 비에 씻긴 지뢰가 민간인 희생자를 낳고 있다. 1997년 전세계 89개국 정부가 참여한 대인지뢰금지조약이 체결됐지만 한국은 아직 예외적인 국가로 남아 있다. 미국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올해 2월 부시 행정부는 그나마 2006년엔 제거하겠다던 클린턴의 약속마저 내팽개쳤다. 한반도엔 대인지뢰가 있어야 한다는 게 이라크에서 생화학무기를 없애자면 전쟁을 해야 한다던 부시의 믿음이다. 그리고 너무 당연하다는 듯 지금도 대한민국에선 전국의 군사 훈련장과 예비군 훈련장에선 지뢰 매설에 관한 교육을 실시한다. 언젠가 우리가 묻은 지뢰가 우리 자식의 손과 발을 날려버릴지 모르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