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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부천이 어쩌다가…

참으로 지조있는 분이시다. 홍건표 부천시장은 유명 배우, 감독을 비롯해 각종 영화단체의 반발에 꿈쩍도 안 했다. 조직위원장으로서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겠다는 저 자세, 눈칫밥로 살아온 철새 정치인이라면 감히 못할 일이다. 수도 이전에 동의했다 슬그머니 말을 바꾼 한나라당이나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를 약속했다 은근슬쩍 뒤로 물러선 열린우리당과 차원이 다른, 소신 정치인이라 할 만하다. 덕분에 설마 이렇게 반대하는데 해촉하겠어, 했던 나는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와, 정말 센데,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이 정도로 강경한 태도라면 김홍준 집행위원장과 적지않은 마찰이 있었겠구나 싶다. 부천영화제에서 김홍준 위원장이 부천시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본 경험이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부천시 유지 몇분이 가족을 데리고 영화를 보러왔다. 좌석이 매진이라 줄을 서야 했는데 그분들은 안내를 담당한 자원봉사자들에게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느냐며 화를 냈다. 영화제에 적지않은 돈을 후원하는 만큼 당연히 특별대우를 받을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김 위원장이 나타나 사정이 이러저러하다는 설명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김 위원장 또한 만만찮은 분인지라 특별대우는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그에겐 영화제가 시의 유력인사를 대접하는 잔치가 돼선 안 된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던 것 같았다. 당연히 그런 태도는 지난해에도 변함없었을 게다.

김 위원장이 각종 홍보물을 찍을 인쇄소를 결정하는 문제로 골치아파하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부천시에선 영화제가 부천의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해야 하는데 왜 각종 인쇄물을 서울에서 찍느냐고 항의했고, 김 위원장은 부천의 인쇄시설로는 인쇄의 질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맞섰다. 지역 경제를 살리고 지역 유지의 체면을 살리는 데 일조해야 한다는 시의 입장이 영화제와 충돌한 전형적인 일들이다. 아마 이런 사건은 그외에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조직위원장인 시장의 이름을 까먹은 실수 정도는 별거 아니고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시장의 항변도 나올 법하다. 영화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를 염두에 둔다면 이번 해촉 사태는 올 것이 온 것뿐인지도 모른다.

새삼스런 일이지만 1회 영화제가 생각난다. 처음 영화제가 생길 무렵, 하필 부천에 영화제를 만드는 이유가 뭔가 궁금해서 여기저기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시 얻은 답변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건 부천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라는 대답이었다. 그 무렵 부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좋지 않았다. 90년대 중반까지 부천, 하면 성고문 사건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1986년 노동운동을 하다 잡혀온 권인숙씨에게 경찰관 문귀동이 성고문을 한 사건은 부천시를 갑자기 유명하게 만들었다. 무시무시한 동네라는 이미지는 그뒤 10년 이상 지속됐다. 영화제를 연다는 아이디어는 지금 생각해봐도 묘안이었다. 영화제를 열면 수도권 젊은이들이 대거 몰려올 것이고 젊은 도시, 활력있는 도시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자연스레 생겨날 것이란 예측은 적중했다. 굳이 영화제의 경제적 효과를 따진다면 이렇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변화일 것이다.

부천은 영화제를 통해 건강하고 살기 좋은 도시라는 평판을 얻었다. 지금은 누구를 잡고 물어도 성고문 사건보다 부천영화제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지조있는 시장의 선택으로 부천에 대한 기억은 다시 한번 바뀔 것 같다. 김 위원장 해촉 결정은 영화제가 8년간 쌓은 부천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다. 이제 부천은 시장의 소신 덕에 영화제를 망친 도시로 영영 남을 모양이다. 혹시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해촉 결정을 내린 걸까. “시장 한번 잘못 뽑으면 어떻게 되는지, 다들 아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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