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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딴따라, 연예인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각

‘연예계 X파일 사건’ 과 관련한 기자회견

“음악 좀 그만 들어라, 너 딴따라 될래?” 남보다 철이 늦게 들었던 10대 시절의 나는 아버지가 이렇게 말할 때 한마디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그땐 잘 몰랐지만 딴따라가 된다, 는 건 인생 종친다는 말로 들렸고, 무서웠다. 대입 시험을 치른 다음날 그동안 모은 돈으로 오디오를 샀고 몇주간 몇장 안 되는 레코드판을 바늘이 닳도록 들으면서 ‘이러다 진짜 딴따라 되는 건가?’ 걱정하기도 했다(그때 나는 착한 청소년이었다). 외국에선 다들 아티스트라고 부른다는데 우리나라에선 왜 딴따라라고 부르는 건지, 그 단어가 주는 묘한 뉘앙스가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딴따라가 될 만한 재능도 열정도 없었으니 바보 같은 망상이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딴따라는 (적어도 내겐) 저주받은 단어였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딴따라는 ‘연예인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라고 적혀 있다. 아직 유교 전통이 건재한 이 나라에서 연예인을 천민 취급했다는 뜻일 것이다. 전통을 숭상하는 우리 민족은 참으로 자랑스럽게 이 낡은 계급의식을 제대로 계승해온 것 같다. 요즘 세상에 누가 연예인을 천민 취급한단 말이냐고 하겠지만 이번 X파일 사건을 보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딴따라에 대한 경멸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건의 경위가 무엇이든 X파일이라 불린 그 문건에 들어 있는 내용은 지금 우리가 연예인을 어떻게 보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특히 여자 연예인은 좋게 말해봐야 기생이라는 식의 인식이 은연중 들어 있지 않은가. 그게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 온갖 망측한 루머로 돌변했다. 이 문건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모든 과정에 하나의 전제가 있다면 그건 연예인은 딴따라고 딴따라는 천하다는 것이다. 뒤에선 더러운 짓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이 음란한 상상력이 연예인에 대한 선망 바로 뒤편에 동전의 양면처럼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건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그들에 대한 불타는 질투심을 상쇄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나 안심하고 싶은 것이다. X파일은 내가 그들 같은 천민보다 낫다(낫다고 믿고 싶은!)는 계급적 우월감의 산물이다.

<그때 그 사람들>

단지 유교사회였기 때문이라고 단순화할 순 없다. 여기엔 가슴 아픈 역사가 도사리고 있다. <그때 그 사람들>을 보다 문득 그걸 깨달았다. 1979년 10월26일. 그날 궁정동 연회장엔 한 여가수와 배우가 되고 싶었던 한 여대생이 불려갔다. 국가기관인 중앙정보부와 대통령 경호실이 대통령의 채홍사 노릇을 했던 때가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 그걸 거부할 힘이 연예인에겐 없었고 연예인의 생사를 결정할 권력이 그들에겐 있었다. 어디 대통령만 그랬겠는가? 9년 전 영화촬영장에서 만난 조폭 보스 조양은은 왕년에 유명가수 아무개를 손봐준 적 있다고 자랑 삼아 말했다. 나이트클럽 밤무대와 조폭의 관계를 생각하면 능히 그랬을 법한 얘기다. 그런 어두운 기억들을 X파일은 오늘에 되살려놓았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는 이놈의 X파일에도 들어 있는 것이다. X파일을 안줏거리로 씹다가 목에 턱턱 걸리는 느낌을 받은 사람이 나 혼자일까? 토해도 나오지 않는 이 불쾌감이 개인정보보호법이 생긴다고 없어질 것 같지는 않다. 딴따라라는 말은 그래서 여전히,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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