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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삼순이를 응원한다

<내 이름은 김삼순>

“나는 나 자신도 삼순이도 노처녀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몰아가는 건, 사회가 아닌가 싶다.” 이번호 특집기사에 들어 있는 인터뷰에서 배우 김선아가 한 말이다. 이 말을 읽으면서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김삼순, 아니 김선아가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노처녀란 사회가 만들어낸 말이며 어떤 편견을 재생산하는 단어다(나이든 미혼 여성은 빨리 결혼시키라는 압력이 절로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예로 동성연애를 들 수 있다. 동성연애는 이성애의 반대말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성행위라는 데 방점이 찍힌 말이다. 동성애자에게 그런 것처럼 노처녀에게도 인권탄압은 그치지 않는다. 세상은 운전하는 여자에게 폭언을 퍼붓듯 싱글로 사는 여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줌마, 아니, 처녀라고? 그러니까 시집을 못 갔지”라며.

노처녀라는 희생양은 남성적 지배질서에 꽤 쓸모있는 존재다. 그들은 한마디로 만만하다. 파업을 결의할 조직도 없는데다 결혼이라는 전선에 서면 대오를 이탈하기 십상이다. 그중 일부는 전투적 페미니스트가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혁명이나 체제전복을 선동할 만큼 무모하지는 않다. 그들은 “내게 권력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가슴에 멍들지 않게 예의를 지켜달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에 복수하는 방법은 친절하기 이를 데 없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올드미스 다이어리> 같은 드라마는 그들 방식의 복수다. 못난 사내들이 능력있는 여성을 시기하고 무시하는 동안 그들은 함께 웃으면서 당신과 다르지 않은 삼순이와 금자를 사랑하도록 만들었다. 이름하여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전법이다.

난 삼순이가 우리 시대의 광대라고 생각한다. <반칙왕>의 소심한 은행원 임대호나 <공공의 적>의 무식한 형사 강철중이 그런 것처럼. 단순히 그녀가 나이든 미혼 여성의 대변자로 나섰기 때문만은 아니다. 임대호와 강철중이 송강호, 설경구와 떨어질 수 없듯 김삼순은 김선아의 작품이다. 김선아가 살을 찌워 김삼순이 된 것은 설경구가 영화 <역도산>을 위해 몸무게를 늘린 것 못지않게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 정도 스타라면 아무도 TV드라마를 위해 그런 희생을 각오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두 뒤축이 포장마차 의자에 끼여 뒤뚱거리는 저 어처구니없는 시추에이션을 보라. 저정도 슬랩스틱코미디를 구사하는 배우가 한국에 몇이나 더 있는가. 혹여 영화잡지가 TV드라마에 너무 열을 내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내 이름은 김삼순>은 어지간한 로맨틱코미디영화들보다 한수 위다. 그간 김선아가 출연한 영화들만 돌아봐도 분명하다. 그녀의 깜찍한 재능은 이번에야 제대로 놀 수 있는 물을 만났다.

물론 <내 이름은 김삼순>은 아직 초반이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른다. 뻔한 신데렐라 드라마로 주저앉을 수도 있고, 초심을 밀고나가 색다른 로맨틱코미디를 완성시킬 수도 있다. 어느 정도 정해진 길이고 그 길을 벗어나면 끝이라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할 것이다. 어쩐지 이게 드라마의 길이기도 하지만 삼순이의 길이기도 하다는 느낌이 든다. 삼순이가 사랑을 성취하지 못하는 우울한 결말을 바라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맹탕처럼 남자한테 끌려다니길 바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저 내가 바라는 것은 삼순이스런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다. 삼순이스런 태도가 어떤 거냐? 온 세상이 결혼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다이어트로 무장하라고 선동하는 이 시대에 굴하지 않고 자신에게 당당한 거다. “라떼 하나 주세요. 시럽 듬뿍 넣구요”라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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