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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대학졸업을 맞는 여학생들에게
2000-02-22

최근 한 대학생 단체에서 강의하게 되었다. 마흔을 넘기면서 '젊은층'이라는 착각이 확실히 불식되고 나이에 대한 자의식이 생겨나고보니, 진짜 젊은층들은 요즘 어떤 생각을 하나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 강의시간 2시간 중 한 시간 강의하고 30분 질문받고 30분 질문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내가 학생들에게 던진 질문은 대체로 직업관/결혼관 따위였다. 재미있는 건, 여학생들에게 결혼관을 물었을 때였다. 졸업후 결혼해서 현모양처 되는 것이 꿈인 사람? 아무도 없었다. 졸업후 취직하고 결혼해서 두 가지 모두 하며 살겠다는 사람? 절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사회활동만 하면서 독신으로 살겠다는 사람?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 나머지 절반의 정체는 뭐지? 혹시, 동성애 커플을 만들 계획들인가? 한 학생 대답이 졸업후 취직했다가 결혼하면서 그만둔다는 것이다. 그게 나머지 절반이라는 것이다. 그런 길도 있긴 있었군.

지금은 여성특파원을 둔 신문사도 여럿이지만,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82년만 해도 여성특파원은커녕 수습기자채용공고에 ‘병역필한 남자에 한함’이라고 못박은 언론사가 절반이었다. 여자를 뽑는 회사 가운데서 또 절반쯤은 ‘결혼하면 사직하라’는 풍토였다. 나는 대학 때 학과 공부가 중간 정도였지만, 정말 또랑또랑 발표도 잘하던 그런 여학생들 중에 지금 사회활동하는 친구들은 거의 없다. 밥 딜런의 노래가사처럼, 꽃들은 처녀들 품으로, 처녀들은 청년들 품으로 가버린 것이다. 그래도 이제 직업과 가정을 병행하겠다고 선포하는 학생이 절반은 되는 것을, 지난 20년 사이 진보의 흔적이라고 봐야 될까. 하지만 불만인 건 진보의 속도다. 최근 비례대표 후보 30% 여성할당제가 관철되고 여성후보들이 많이 공천받는 건 분명 대단한 변화다. 하지만 이건 가령 백혈병에 대해 주사 한대에 해당하는 처방이다. 95년 한 UN 보고서에서, 한국은 GNP가 132개국 중 27위, 여성의 취학률은 130개국 중 27위, 행정관리직에서 여성비율은 116개국 중 112위다. 요약하자면, 한국은 잘살고 여자들 공부는 시키지만 일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여성문제의 여러 이슈들 가운데 고용평등이 최우선순위인 건 그래서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는 여성 자신들이 얼마나 기막히게 낙후된 여성인권후진국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의회 내 여성비율에서 한국은 우간다의 절반도 못 미친다는데, 한국의 여성들은 진보의 걸음걸이를 지금의 곱절은 빨리 해야 우간다만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운동도 결국은 권력을 나눠갖자는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무상분배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란 권력자의 목을 졸라야 그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