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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학생, 다수의 마이너리티

<선생 김봉두>

<연애의 목적>을 보면서 치가 떨린 장면이 하나 있다. 교생 홍과 연애한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자 흥분한 유림이 학생들을 때리는 대목이다. 왜 이런 장면이 필요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너무 화가 나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란 걸 보여줘야 했으리라.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 선생들이 있었지, 라고 생각하지만 난 그런 유림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유림을 귀엽고 사랑스런 모습으로 분칠하는 영화에 화가 났다. <연애의 목적>을 보여주려면 까짓 애들 몇놈 엉덩이 때리는 게 대수인가, 라는 생각이었던 걸까. 아마 내 뺨을 갈겼던 고등학교 시절 선생도 그런 식이었으리라. 개인적인 분풀이가 필요했을 수도 있고, 선생이 애들 때리는 걸 별거 아닌 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년 이상 지난 지금도 그들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친다.

이런 예는 적지 않다. <여선생 vs 여제자>에는 사리사욕에 눈이 먼 선생이 초등학교 아이들의 소지품을 뒤지고 브래지어를 했나 안 했나 가슴을 만져보는 장면이 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에겐 인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영화 뒤에는 초등학교 아이들이라면 함부로 만지고 뒤져도 괜찮다는 발상이 깔려 있다. 그래놓고 선생을 위해 눈물 흘리기를 바라는 감독의 태도를 나는 뻔뻔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감독이 만든 <선생 김봉두>에도 똑같은 문제가 있다. 나는 선생 김봉두를 위해 눈물 흘리는 순진한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이 안쓰러웠다.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논리에 내 마음엔 핏대가 섰다. “비겁한 변명입니다”라고 외치면서.

며칠 전 국가인권위원회는 “두발 자유는 학생의 기본권”이라는 발표를 했다. 머리가 길다고 강제로 머리를 깎인 학생들이 인권위에 진정서를 내서 이뤄진 조치였다. 뉴스를 접하면서 놀랐던 건 그럼, 여태 그걸 몰랐나, 하는 점이었다. 관련 뉴스를 뒤져보니 그동안 중·고등학생들은 두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서명운동, 촛불시위 등 여러 가지 행동을 도모하고 있었다. 인권위의 이번 발표는 말하자면 투쟁의 결과물이다. 사태를 보면서 마음 한구석으로 요즘 아이들 참 장하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한 한편 우리 교육현실이 아직 이 수준이구나 싶어 씁쓸했다. 궁금한 것은 그동안 학교 관계자들은 학생들 머리를 단속하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점이다. 학생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머리 한가운데에 터널을 만들 수 있었을까. 20여년 전에 없어졌던 두발 단속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학생의 인권을 얼마나 쉽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일종의 무신경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사소한 학생의 권리까지 신경쓰기엔 우리 너무 할 일이 많잖아, 라는 식의 생각. 매일 학생과 마주하는 선생들도 그럴진대 흥행과 예술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온 신경이 곤두선 영화감독이야 일러 무삼하리요. 그럼 영화가 도덕교과서라도 돼야 한단 말이냐, 는 항변이 들리는 듯하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도덕교과서처럼 재미없는 영화를 누가 보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도덕이나 윤리 또는 정치적 올바름과 무관할 수도 없다. 나는 윤리적 선택이자 영화적 태도로서 한국영화가 그들이 다루는 학생들에 대해 예의를 갖췄으면 좋겠다. 그래야 21세기에 “두발 자유는 학생의 기본권”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뉴스로 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지금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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