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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친절한 금자씨>

<친절한 금자씨>

가끔 드라마 <제5공화국>을 본다. 대단한 완성도를 지닌 드라마는 아니지만 나의 정치의식이 자랐던 80년대를 다루고 있기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그동안 이 드라마는 전두환 일당의 악행을 하나하나 들춰냈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기 직전 전두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 그때를 경험 못한 세대라면 그냥 즐기며 볼 수도 있겠지만 나로선 이 드라마를 보며 오래전 아물었던 상처를 헤집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구가 되었던가. 20살 무렵 그런 사실을 처음 접하고 울분을 터트렸던 순간이 떠오른다. 지금 드라마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 차원이 다른 분노가, 그때는 있었다.

엉뚱하지만 <친절한 금자씨>를 보면서 <제5공화국>이 떠올랐다. 최민식이 연기한 백 선생이라는 인물이 전두환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인에게 불행을 몰고온 악인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억울한 자를 대신 가두고 자신은 법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친절한 금자씨>가 던지는 어떤 질문이 백 선생에게서 전두환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친절한 금자씨>는 사회와 법과 제도가 처벌하지 못한 악인에게 우리가 취할 태도를 묻고 있다. 당신이라면 저자의 심장에 칼을 꽂을 것인가. 옆사람에게 미룰 것인가. 사적 복수를 금하는 현대를 살면서 이런 질문은 위험한 것이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전두환은 자신이 저지른 명백한 범죄와 어울리지 않게도 2년 조금 넘는 기간 백담사를 다녀온 것으로 면죄부를 받았다. 용서하고 화해하자는 제스처에 너도나도 어, 어, 하다 더이상 죄를 물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마치 메롱, 하듯 전두환은 말한다. “본인은 통장에 29만원밖에 없다니까.”

그를 처벌할 수 있었던 시기에 법의 집행자들은 너도나도 셈을 하기 바빴다. 용서하면 어떤 이익이 있나, 화해하면 누구의 표를 끌어들일 수 있나, 하고. 그들은 수많은 피해자들의 피눈물을 외면하고 각자의 몫을 챙겼다. <친절한 금자씨>는 그런 우리 자신에 대한 조롱과 분노와 연민을 담고 있다. 그렇다. 조롱과 분노와 연민. 이것은 슬퍼하면서 기뻐하라는 말처럼 어색한 조합이다. 한데 묶일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탓에 <친절한 금자씨>는 제목만큼 친절한 영화가 아니다. 무척 친절한 목소리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설명을 하고 있는데 막상 그 목소리를 듣는 우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건 한국사회에서 가장 끔찍한 비극이 가장 웃기는 코미디로 변하는 걸 지켜봤을 때 느낀 혼란과 비슷한 것이다. 비극을 희극으로 만드는 한국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박찬욱은 “받은 만큼 드릴게요”라고 답하는 것 같다. 그의 영화 또한 온통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의 부조리한 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는 “왜 그렇게 모든 요소가 적당히 조화로운 게 아니라 무언가 과잉된 영화를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한국사회가 그렇게 한가하고 평화롭진 않다”고 말했다. <친절한 금자씨>를 보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나는 <친절한 금자씨>가 <올드보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리 만무하고 실제로 시사회 이후 선명히 입장이 갈리는 평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는 이번 특집에서 외국 평론가 3인과 김소영 교수의 리뷰를 받았다. 굳이 외국 평론가를 내세운 이유는 박찬욱의 영화를 보는 색다른 시각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성욱 기자의 비평과 평론가 4인의 리뷰는 박찬욱 영화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일 프리즘이다(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스포일러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영화를 본 뒤에 읽는 편이 좋겠다). 물론 이건 끝이 아니다. 박찬욱에 대한 토론은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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