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전주국제영화제의 즐거움

전주국제영화제 공식일간지를 발행하기 위해 몇몇 기자들과 함께 전주에 내려갔다. 출범 초기, 프로그램팀이 해임되는 말썽을 빚기도 했던 전주영화제는 올해로 7회를 맞으면서 그에 걸맞은 안정감을 갖춰가고 있다. 영화제 홍보팀장에 따르면 객석점유율은 지난해보다 떨어질지 모르지만 전체관객 수는 지난해보다 늘었다고 한다. 영화제 기간 내내 일간지를 만든 기자들도 전체적인 시스템이 조화롭게 돌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피력했다. 스타가 많이 오거나 영화 비즈니스맨들이 북적거리는 영화제는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영화에 집중할 수 있는 영화제라고 할 만하다. 무엇보다 올해 영화제의 프로그램은 칭찬받을 만했다. 인도의 거장 리트윅 가탁의 회고전과 과거 소비에트 연방의 금지된 영화들을 선보인 특별전은 그중 백미였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리트윅 가탁의 <강>이었다. <강>은 시인의 재능을 지닌 감독이 만든 사회비판 리얼리즘의 걸작이다. 영화는 가난과 정치적 박해에 시달리는 피난민 거주지에서 시작한다. 궁핍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부유한 대학 시절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인 주인공 남자는 어느 외진 마을의 철강공장에 취직한다. 함께 피난민 아이들을 가르치자는 동료를 외면하면서 남자는 아직 나이 어린 여동생 시타에게만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여동생을 위해 개인의 부와 자유를 택한 그는 그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공장장이 되는 사회적 성공을 이룬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이 남자의 삶은 스스로 만든 편견 앞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여동생 시타와 함께 컸던 비천한 계급 출신의 고아 아브히람이 시타와 사랑에 빠지자 남자는 둘의 사랑을 가로막는다. 남자는 아브히람에겐 유럽에 가서 공학공부를 하라고 윽박지르는 한편 시타에겐 부유한 집안에 시집갈 것을 강권한다. 아마 남자는 자신이 세상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브히람이 비참한 현실을 그린 소설을 쓰는 것에 반대하고 시타가 아브히람을 사귀는 걸 반대하는 것은 이 남자의 입장에서 당연하다. 세상의 질서를 거스르는 철모르는 젊은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굶주림과 핍박뿐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으면 행복이 찾아오는가? <강>의 후반부에 찾아오는 절망적 사건들은 정신을 가다듬을 틈을 주지 않는다. 희망은 어렴풋이 잡힐 듯 말 듯 다가왔지만 절망은 해일처럼 거대한 형체를 드러내며 쉬지 않고 같은 자리로 찾아온다. 그 헤어날 수 없는 악순환은 영화가 처음 시작할 때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주인공 남자가 여동생의 어린 아들의 손을 잡았을 때 비로소 끝이 난다.

<참회>

소비에트 연방 시절 금지됐던 영화들도 리트윅 가탁 못지않게 생소한 작품들이었다. 내가 본 영화는 우크라이나 출신 키라 무라토바의 <기나긴 이별>과 그루지야 출신 텐기즈 아불라제의 <참회>였는데 두편 모두 발견의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최근 영화 가운데는 로드리고 가르시아의 <나인 라이브즈>가 인상적이었다. 전주영화제에서 얻은 좋은 반응에 힘입어 수입과 개봉이 이뤄졌으면 한다. 영화 얘기를 길게 했지만 사실 영화만 좋았던 건 아니다. 5월의 전주에는 몸과 마음을 토닥거리는 분위기가 있다. 아마 여기엔 먹을거리가 크게 한몫을 할 것이다. 이번 전주영화제 일간지에 <씨네21> 김유진 기자가 쓴 시조들이 떠오른다. “보는 것은 욕망이로되 먹는 것은 본능이오/ 영화만 구경하면 주린배가 어엿보니/ 아희야 영화제도 식후경이라 하노라.” “눈 흘린 듯 어떠하리 눈 버린 듯 어떠하리/ 전주의 참맛은 그 혀만이 알터인데/ 젓가락 먼저 움직여도 나무라지 말아라.” 옳거니, 서울에 올라가면 무엇보다 전주음식 금단현상에 시달릴 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