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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폐인들이여, 단결하라!

폐인이라는 말을 언제부터 쓰게 됐을까. 기억이 맞다면 <다모>가 시초이겠으나 <다모> 이전에도 폐인은 많았다. 고백하자면 나도 폐인이었다. 이주일, 심형래, 최양락, 이창훈 등 당대를 주름잡던 코미디언들이 10대 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그들의 몸동작을 흉내내고 유행어를 따라하면 친구가 생겼고 대화가 통했다. 커서 뭐 되려고 하며 쯔쯧 혀를 차는 어른들 때문에 정말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나 싶었지만, 보고 있으면 웃긴데 어떻게 참고 안 보나. 그래서인지 코미디가 애들을 버린다는 말을 들으면 뜨끔하다. 내가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는 사례일까. 그럼 영구 흉내를 잘 냈던 종팔이는, 맹구를 따라했던 삼득이는? 걔들도 다 인생 종쳤나. 잘만 사는 것 같던데. 코미디가 애들을 버린다는 말은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라고 쓴 원시 동굴 벽화의 글귀 같은 게 아닐까. 코미디를 예로 들었지만 실은 TV라는 것 자체가 늘 욕을 먹었던 대상이다. 오죽하면 TV를 끄자, 는 운동이 나왔을까. TV는 오랫동안 바보상자라 놀림받았고 가족의 대화를 가로막는 주범으로 손꼽혔다. 그런데 정말 TV를 끄면 똑똑해지고 가족이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게 되는가. 그렇다면 좋은 일이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이미 TV는 막으려 애쓴다고 막아지지 않는 일상의 한 요소가 됐다.

TV를 얕잡아 보는 데는 TV에 대한 언론의 태도가 한몫을 했다. TV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TV가 허접하다는 걸 입증하려고 눈에 불을 켜는 엄숙주의자의 태도, 다른 하나는 TV가 생산하는 모든 것을 스캔들처럼 포장하는 포털 연예뉴스의 태도. 이런 두 가지 자세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어딘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정말 TV를 그런 시각으로만 봐야 하는 것일까. TV를 영화처럼 <씨네21> 스타일로 다뤄보면 어떨까, 생각한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돌아보면 <씨네21> 창간 초기에 한국영화는 지금의 TV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한국영화에 정당한 대접을 해야 한다고 믿었고 기사를 발굴했다. 이제는 TV에 관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때가 된 것 같다. 관록있는 배우들, 예술가의 경지에 올라선 엔터테이너들, 자기 세계를 구축한 작가들, 그야말로 영상문화의 창작자들이 다른 어느 분야보다 활발히 활동하는 곳이 TV이다. 그들에게 그들의 위치에 합당한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의 작품에 대해 풍성한 이야기를 풀어보는 자리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매거진T>는 이런 생각에서 시작하게 된 일이다.

<매거진T>의 편집장을 맡은 백은하 기자는 입사할 때부터 범상치 않은 TV 폐인이었다. 이미 <씨네21>에서 빼어난 필력을 보여줬던 그가 <씨네21>을 뛰어넘을 <매거진T>의 야심을 제시했을 때 흠칫 놀랐다. <씨네21>에서 <씨네21>의 강력한 경쟁매체를 만들다니, <씨네21> 독자를 <매거진T>에 뺏기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매거진T>에서 준비한 <연애시대> 특집이나 개그맨 유재석 인터뷰 등 다양한 기획과 강명석, 이명석, 김현진, 구둘래 등 막강한 필진을 확인하면서는 더욱더 그랬다. 5월29일 <매거진T>의 오픈을 기다리면서 속으로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 떨고 있니?” 그래도 TV 폐인들에게 즐거움을 줄 새로운 매체를 만들게 돼서 기쁘다는 마음이 먼저인 건 분명하다. <매거진T>는 캐치프레이즈를 “TV피플의 놀이터”라고 내걸었다. 그걸 달리 표현하면 이렇다. “한국의 폐인들이여, 단결하라!”

P.S.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지면의 진중권, 오귀환 두 필자가 개인 사정으로 더 쓸 수 없게 됐다. 특히 진중권씨는 이번호에 읽는 이의 가슴이 아파오는 마지막 원고를 보내왔다. 그동안 치러야 했던 치열한 싸움을 생각해보면 그가 느끼는 피로와 고통이 전해진다. 진중권씨가 다시 에너지를 회복하시길 빈다. 그리고 두 필자에게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드린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지면은 곧 새로운 필자를 맞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