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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지단, 현대의 신화

“지단의 은퇴경기가 될 것이다.” 라울은 그렇게 말했다 스페인행 보따리를 쌌다. “지단의 마지막 경기가 될 것이라 유감이다.” 브라질의 카를로스도 그렇게 말했다 고국에서 팬들의 야유에 직면했다. ‘지단의 저주’라는 말이 돌 정도로 지네딘 지단이 이끄는 프랑스팀은 그들을 비웃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렸다. 지단의 저주가 무서웠는지 4강전 상대 포르투갈은 지단의 은퇴 운운하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역시 지단의 페널티킥 골을 먹고 독일을 떠났다. 98년 프랑스에 월드컵을 안겨준 34살 축구선수 지단은 그렇게 돌아왔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 은퇴 발표를 한 선수가 이만큼 잘하리라는 건 지단의 열혈팬조차 예측 못한 것이리라. 브라질과의 8강전. 지단이 그 유명한 마르세유 턴(360도 회전해서 수비수를 따돌리는 지단 특유의 개인기)으로 수비수 서넛을 제치고 무인지경에 패스를 넣어주는 장면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축구팬으로서 지단의 시대를 함께할 수 있어 고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직 결승전의 승자가 누가 될지 모르지만 1998년 월드컵과 마찬가지로 내게 2006년 월드컵은 지단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지단에 대한 프랑스인의 사랑이 각별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철저한 프로정신이 돋보이는 이 사나이는 프랑스 대표팀이 아프리카 출신 선수 위주로 이뤄져 있다고 비판한 극우정당에 맞선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지주’라는 그의 프랑스어 애칭이 팀의 정신적 지주라는 우리말과 동의어로 들릴 만한 일이었다. 2004년 유럽선수권대회가 끝나고 대표팀에서 은퇴했던 지단은 월드컵 유럽지역 예선에서 프랑스팀이 위기에 몰리자 SOS신호를 받고 대표팀에 복귀했다. 지단이 돌아오자 프랑스 경제가 활기를 되찾았다는 뉴스가 나왔던 걸 보면 지단 효과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올해 칸영화제에선 <지단, 21세기의 초상>이라는 영화가 공개되기도 했다. 그런 지단이지만, 아니 그런 지단이었기에 16강 예선에서 보여준 실망스러운 경기력은 언론의 표적이 됐다. 지단이 없어야 팀이 산다는 말이 나왔고 프랑스는 늙은이로 이뤄진 팀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한국전 후반에 교체돼서 벤치로 가던 지단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거칠게 주장 완장을 벗었고 화가 치밀어 로커룸 출입문을 박살냈다. 두장의 옐로카드를 받은 지단에겐 너무도 참담했던 한국전이 은퇴경기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16강전에 돌입하면서 칼을 갈았을 거란 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스페인전에서 세 번째 골을 넣었고 브라질전에서 앙리에게 프리킥으로 어시스트를 했으며 포르투갈전에서 특유의 침착함을 발휘하며 골네트를 갈랐다. KBS 한준희 해설위원의 말대로 “컨디션에 기복이 있을 순 있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지단을 보면서 서부극의 영웅들이 떠올랐다. <하이 눈>의 게리 쿠퍼나 <수색자>의 존 웨인 같은 인물. 쓸쓸히 퇴장할 운명을 알면서 마지막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가족와 마을을 구해내는 남자. 아마 이런 연상을 한 데는 지단이 이미 은퇴선언을 한 선수라는 게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박수칠 때 떠나면서 고별무대를 최고로 장식하는 슈퍼스타의 모습. 그걸 지켜보는 흥분과 감동이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언젠가 사전에서 ‘지단’이라는 단어를 찾으면 멋진 퇴장을 그린 낭만적 판타지를 뜻함, 이라는 설명이 들어가지 않을까.

이처럼 스포츠 스타는 현대의 영웅신화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런 신화를 만드는 결정적 기능을 전세계로 방송되는 TV카메라가 담당한다. 이번주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글은 월드컵 중계가 어떻게 현대의 신화를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꼼꼼히 읽어보면 스포츠와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시선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