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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박치기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이 좋아하는 야쿠르트 스왈로스 야구팀의 경기를 보다가 날아가는 타구를 보고 이제 소설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박민규는 TV에서 마이크 타이슨이 상대 선수의 귀를 물어뜯는 장면을 보고 소설 쓰기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런 식이라면 지단이 박치기하는 장면을 보면서 뭔가 중대한 결심을 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냥 박치기를 하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프로레슬러 김일의 박치기를 보고 자란 세대라서 그런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파워풀한 박치기였다. 영웅다운 마지막 무대를 기대했는데, 어머나 박치기라니, 한동안 멍하더니 이번주 내내 머리 속에서 박치기 장면이 리플레이됐다. 아마 지난주에 지단을 현대의 신화라고 부른 글을 썼던 터라 더 그랬을 것이다. 내 멋대로 규정한 신화를 지단이 머리로 박살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난 7월13일 지단이 입을 열면서 진실게임은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사람들마다 누구 잘못이 더 큰가를 놓고 갑론을박을 했다. 남은 것은 FIFA의 조사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일 것이다. 하지만 사건의 전개와 무관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저게 진짜 지단이다, 라는 생각이다. 현역으로 뛰는 마지막 경기인데, 월드컵 결승전인데, 대표팀 주장인데, 축구의 영웅인데 등등 절대 그런 행동을 해선 안 될 조건이 여럿 있었지만 지단은 박치기를 선택했다. 그의 축구 인생에 오점이 될 행동이지만 그냥 저질러버린 것이다. 결점없는 영웅으로 남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산산이 부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그는, 나는 꼭 사람들이 원하는 나일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지단의 박치기는 마치 나도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일 뿐이라고 웅변하는 일종의 퍼포먼스 같았다. 해피엔딩이 예정된 대중영화였던 작품이 갑자기 알쏭달쏭한 예술영화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통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고 그저 어안이 벙벙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일이 축구선수 지단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배우를 비롯한 수많은 스타들이 비난받을 실수를 한다. 최근 <뉴스위크>를 보니 조니 뎁을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아버지가 된 뒤로 성숙해진 조니 뎁을 강조하기 위해 기사는 그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21 점프 스트리트>라는 TV드라마를 찍던 시절엔 툭하면 화를 내고 다퉈 현장 분위기를 망쳤고 1994년엔 뉴욕의 어느 호텔방에서 기물을 파손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제멋대로이고 흥행 안 되는 영화만 찍는 배우라는 소문이 돌았던 그가 <캐리비안의 해적>부터 A급 배우로 대접받게 됐다. 기사는 비딱하던 조니 뎁이 점잖은 어른이 된 걸 찬양하는 것이었지만 개인적으론 성숙하기 전 조니 뎁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성숙한 조니 뎁과 미숙한 조니 뎁 가운데 어느 하나만 선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성숙한 조니 뎁이란 것도 결국 미숙한 조니 뎁이 쌓여서 만들어진 거니까.

사람들은 쉽게 스타라면 성인군자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부와 인기를 얻었으니 반대급부로 그만큼 충동을 억제하고 살라는 요구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스타도 우리랑 같은 사람이라는 걸.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안성기가 존경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배우가 안성기처럼 사는 걸 상상해보라. 그것 또한 무지 심심한 세상이 아닐까. 그런 점에선 박치기가 있어 재미있는 세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정도가 심하지 않다면 박치기 한번쯤은 눈감아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이 당신, 습관적으로 박치기하는 건 정말 곤란하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