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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총을 잡지 않을 자유

“베트남 참전군인이었던 저희 아버지는 마흔아홉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아주 오랫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웃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병에 대한 공포보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미 잊혀진, 전쟁에 대한 공포가 더 컸습니다.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것은 전쟁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저는 친구들을 집에 데려온 적이 없습니다. 저는 병들어 신음하는 아버지가 창피했습니다. 저는 그런 불효자였습니다. 불효자인 제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못한 효도를 이제 시작하려 합니다. 저희 집에, 아버지의 집에 제 친구들을 마음껏 초대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람마다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듯이 사회에 봉사하는 방법도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를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곧 현실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방문자>

신동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방문자>는 4분여의 롱테이크로 여호와의 증인인 청년이 법정에서 진술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청년은 총을 잡지 않겠다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재판을 받았고 끝내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영화는 청년의 이런 행동에 지극히 속물 같던 지식인 주인공이 크게 감화받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매사에 불평불만만 터트리고 지적 허영심에 사로잡혀 있던 주인공은 이 청년의 때묻지 않은 양심을 목격하고 오래전 잃어버렸던 눈물과 웃음을 되찾는다. 그렇게 쉽게 주인공의 심경에 변화가 올 것이라 말하는 건 순진한 일이겠으나 이 4분여의 롱테이크는 분명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어찌 보면 저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다니, 과잉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엔 과잉이 불가피하다는 생각도 든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분단 현실과 판문점의 역사에 대해 말로 설명하는 장면이 그러하듯 이런 순간엔 직접적 호소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라는 요구는 그만큼 지금 이곳에서 절실하다.

“예수께서는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방문자>에서 청년은 총을 잡지 않겠다는 신념의 근거를 예수의 가르침에서 찾는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여호와의 증인의 태도가 이단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집총거부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예수뿐 아니라 부처도 살생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해도 살인하는 법을 배우지 않겠다는 결심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유독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한국사회의 거부감은 강하다. 현역의 1.5배에 달하는 기간 동안 대체복무를 하겠다는데도 봉사활동을 할 기회를 주는 대신 감옥에 보낸다. 방위산업체 근무, 공익요원, 공중보건의 등 수많은 대체복무자가 이미 존재하건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만은 전과자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의사나 박사가 대체복무를 하는 건 괜찮고 개인의 신념에 따라 대체복무를 하는 것은 안 된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신념을 우습게 여기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건 신념을 헌신짝처럼 버리곤 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면서 신념이나 양심 따위 우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얼마 전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에서 한국의 인권상황에 대한 권고안을 냈다. 국가보안법 폐지, 이주노동자 권리 보장, 남녀 동등권리 보장 등과 함께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대체복무 도입을 권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유엔의 권고안에 귀를 막고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 나왔다는 것만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과연 희극일까 비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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