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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불로소득

지난 10년간 영화계를 취재하면서 당황스러웠던 경험 가운데 하나는 영화계에 불어닥친 상장 바람이었다. 감독이나 배우를 만나 예술을 논하면 되는 줄 알고 시작한 영화기자 일이었기에 어느 영화사가 합병을 했고 상장을 했는데 주가가 얼마라더라, 하는 뉴스를 취재하는 건 어딘지 낯설고 어색했다. 제작자들은 한국영화의 호황에 힘입은 상장 열풍을 환영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런다고 촬영현장에 금테를 두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한동안은 변화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저 영화계가 전보다 돈 걱정을 덜하게 됐다고 느낄 따름이었다. 영화하면 배고픔을 연상하던 시대에서 영화하면 대박을 연상하는 시대가 된 것은 이런 상황이 몇년간 지속되면서 서서히 바뀐 인식일 것이다.

영화계의 이런 변화는 크고 작은 진통을 동반하며 이뤄졌다. 특히 투기성 자본이 영화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음험한 것이었다. 유명세가 있는 제작자나 배우를 동원해 주가를 올리고 차익을 챙기는 일도 벌어졌다. 그들이 실제로 제작한 영화가 한편도 없거나 흥행에 실패했더라도 합병이나 제작발표회 같은 이벤트만으로 상당한 돈을 버는 것이다. 그건 영화계에서 익히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영화계에서 이런 투기 자본이 주류가 될 순 없었지만 한동안 의문을 품게 했다. 영화를 제대로 만들지 않고도 돈을 버는 시스템이라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신문 경제면을 자주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이유를 알겠지만 문제는 그 같은 불로소득이 합법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번 돈을 몰래 빼돌리거나 완전히 사기를 친 것만 아니라면 어떤 이벤트를 벌이느냐에 따라 회사 가치가 요동을 쳐도 크게 문제삼지 않더라는 얘기다. 흥행작을 만들지 못해도 그들은 돈을 챙겼고 다음 사냥감을 찾아나섰다. 이런 현상이 영화계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정부가 IT벤처를 지원한다며 푼 돈 가운데 상당액이 이런 거품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돈놀이하는 누군가의 배를 불렸다. 물론 이런 일을 하려면 상당한 금융전문가가 돼야겠지만 그걸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속성이 원래 그렇다지만 그래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버려둘 순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투기 자본에 대한 처벌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이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투기 자본이 크면 클수록 환대를 받았다. 그러니까 무언가 잘못된 것은 상당히 오래전이었다.

부동산 때문에 난리가 났다. 어디서나 집값 이야기만 오고 가는 상황을 보니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든다. 주식 시장 거품에 이은 부동산 거품? 그보다는 불로소득에 관대한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투기는 21세기 한국의 시대정신일지도 모른다. 다들 불로소득으로 잘 먹고 잘사는데 나도 이 참에 한방. 또는 아무리 일해도 그들의 불로소득은 절대 못 따라간다는 무기력감과 분노. 너도나도 바다이야기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것을 도박꾼만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도박으로 돈 버는 법을 가르치는 <타짜>가 전국 650만명을 동원한 것이 영화만의 힘일까. 이미 전체 사회가 돈 놓고 돈 먹는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증권이나 부동산 투기는 괜찮고 도박은 안 된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을까. 작금의 부동산 폭등세가 돌아선다고 해도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 걸 삶의 원칙으로 삼은 사람들, 그런 원칙을 남에게 가르쳤던 사람들은 이미 치명상을 입었다. 어떤 대책이든 그 상처가 남긴 마음의 병을 고치지는 못할 것 같다.

P.S. 피지현 독자님이 <씨네21> 앞으로 귤 한 상자를 보내주셨다. 정기구독자 이벤트를 담당하는 마케팅팀과 <씨네21>을 만드는 모든 분에게 감사하다며 보낸 귤이다. 지면으로나마 고맙다는 말씀을 전한다. 불로소득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노동의 대가는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