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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아저씨들, 눈물 뚝!

“니 와 그랬노?” <친구>에서 감옥에 갇힌 준석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준석이 답한다. “쪽팔리서….”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고 지금도 아리송하다. 친구를 왜 죽였느냐는 질문에 쪽팔려서 죽였다고 말하는 것인가. 쪽팔려서 자수를 했다는 말인가. 아님 왜 친구를 죽였냐고 물었는데 쪽팔려서 자수했다고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한발 떨어져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대화건만 <친구>의 이 석연치 않은 문답은 사나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들의 대화가 우습다고 생각했다면 800만명 넘는 관객이 호응하진 않았으리라. 사람들은 친구를 죽여야 했던 준석을 동정했고 눈물을 흘렸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준석이나 동수나 알고보면 불쌍한 남자니까. 상택이 그랬듯 우린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친 그들에게 돌을 던질 만큼 깨끗하지도 용감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과 그래야 한다는 것은 다르다. <친구>는 당위와 윤리에 속하는 의문을 ‘쪽팔리서…’라는 말로 슬며시 뭉개버린다(조직을 위해 친구를 죽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잠시 하와이에 가주면 안 되겠냐고 최후통첩까지 했으니 할 만큼 했다는 태도다). 당시엔 그래도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런 식의 말줄임표가 유행이 되면서 불거졌다. <파이란>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주먹이 운다> <역도산> <태풍> 등을 거쳐 <비열한 거리>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거룩한 계보> <열혈남아>까지 주류 한국영화의 상당수가 <친구>가 택한 전략을 택했다. 불쌍하니까 꼬치꼬치 따지지 말고 동정의 눈물을 흘려주자는 식이다. <친구>로부터 6년, 한국영화는 연민을 호소하는 남자들로 넘쳐난다.

이번호 특집은 이런 경향을 이제 그만 멈추라는 <씨네21>의 요구이자 일종의 캠페인이다. 주제 넘은 요구라고 느낄 사람도 있겠지만 이젠 쓴소리를 할 때도 됐다는 느낌이다. 비평이 건강한 영화문화를 이끄는 중요한 축이라고 믿는다면 말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영화들을 싸잡아 욕하기 위한 기획은 아니다. 영화마다 전하는 바가 다르므로 때론 공인된 걸작 속에서도 찌질한 남성 캐릭터를 발견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징징대는 남자가 많다는 걸 비판하는 게 아니라 칭얼대는 남자를 미화하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남다은씨의 글에서 예를 찾자면 <해변의 여인>의 중래와 <열혈남아>의 치국을 들 수 있다. 중래는 “끝까지 관객의 연민을 차단하지만 스스로는 자기 연민의 끝을 차라리 적나라하게 내보이는 남자”인 반면 치국은 “하루는 연민에 호소하고 하루는 명령에 복종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하루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남자”이다. 전혀 상반된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한국적 남성성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둘의 차이는 크지 않다. 중래와 치국이 다른 게 아니라 영화가 그들을 보는 시선이 상반된 것일 뿐이라 말해도 좋다. <해변의 여인>이 조롱하던 대상을 <열혈남아>는 가여워한다. 혹시 자기 영화의 등장인물에 대해 애정을 갖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여길지도 모른다. 부모의 심정으로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오냐 오냐 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남이 뭐라 해도 내 자식 하는 짓은 예쁘다? 그렇게 응석받이로 키우다가 망친 아이가 한둘이 아니다.

영화를 하는 사람은 모두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리고 좋은 영화의 기준을 고민한다. 그 기준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씨네21>이 이번호 특집에 내세운 것도 그중 하나로 고려됐음 싶다. 연민을 호소하는 캐릭터가 나온다면 꼭 한번 따져보자. 정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가치가 있는 인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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